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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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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5. 1. 16:04 카테고리 없음

    대안교육과 글쓰기, 학생들이 이미 좋은 글이다

    지난 4월 둘째 주 성문밖학교 학생들은 강화도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강화도의 석모도 자연휴양림을 숙소로 삼고, 전등사와 연미정에 오르고 석모대교를 건넜으며 고려산 진달래꽃들을 둘러봤다. 또한 고인돌유적지와 평화 전망대에서 사진작가인 이시우 선생님을 통해 나를 낮추고 상대방 아래에(under) 서서(stand) 서로를 이해(under+stand)하는 지혜를 배웠다. 특히 수려한 봄 날씨는 그야 말로 선물이었다.

    성문밖학교는 강화도 여행을 기행문으로 작성하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성문밖 여행 공모전’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글을 잘 쓴(?) 학생들을 격려했다. 모든 학생들이 기행문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고 각 교사들이 공정한 심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 가운데 과연 글을 잘 쓴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차원을 넘어 ‘글쓰기’는 대안학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글쓰기는 줄타기와 같다. 긴장감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글에는 본인의 품성이 고스란히 베어난다. 이성 혹은 감성이 풍부한지, 주변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고민은 어느 정도 해보았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희망적인지 혹은 비관적인지, 퇴고는 여러 번 했는지 등. 글쓰기는 아마도 삶을 관통하는 의지이자 자신의 내공을 드러내는 집적체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너무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서도, 힘을 주어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연’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처럼 글 역시 내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글쓰기 관련 두 영화가 있다. 하나는 <더 챔프(Resurrecting the Champ)>(2007)이다.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주인공은 글쓰기를 링 위에 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건 언제나 두렵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인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고 자신의 모든 게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시선들을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잘못된 정보로 기사를 쓴 후 온갖 지탄과 두려움에 직면한다. 주인공은 링 위에 홀로 선 권투 선수와 같았고, 큰 펀치를 맞은 셈이다.

    다른 영화는 <파인딩 포레스터>(2000)다. 이 영화는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J.D. 샐린저의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 통에 형제를 잃은 주인공은 홀로 은둔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한 빈민가의 흑인 소년을 만나면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흑인 소년은 가정의 상처를 글쓰기로 승화 하며 남다른 솜씨를 갈고 닦아 왔다. 작가는 작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주인공은 흑인 소년에게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글을 쓸 때 생각부터 하려고 하지 마라. 생각은 나중에 떠오른다. 우선 가슴으로 써라. 그 다음에는 머리로 고쳐서 써라. 글을 쓰는 첫 번째 열쇠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우선 가장 중요한 건 글에 다양한 색깔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모든 글을 잘 쓸 수 없다. 악기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많은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에는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글, 감상적이고 사색적인 글, 공상적이고 역사적인 글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다. 어떤 글은 보고서가 되고, 어떤 글은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글이 된다. 어떤 글은 채택이 되고, 또 어떤 글은 채택이 되지 않기도 한다. 기행문이 있고, 일기가 있으며, 독후감이 있다. 글은 다양하다.

    다양한 색깔은 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학생들 역시 매우 다양하고 다르다. 최근 읽은 <지식인 복잡한 세상을 만나다>(완웨이강, 애플북스, 2018.03)은 현대교육의 컨베이어 벨트식 시스템을 비판한다. 학생들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유전자가 전부 다르다. 특히 생년월일부터가 다 다르다. 태어난 날이 다르기 때문에 학업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인 완웨이강은 “발육 정도가 모두 다른 학생을 한자리에 놓고 훈련시킨다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상적인 교육모델은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라 수업이 진행되는 1대 1 학습법, 이른바 눈높이 교육”이라고 적었다.

    완웨이강은 현대의 교육체계가 소득 수준과 가족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점을 드러냈다. 소득이 많고 대화가 많은 교양 있는 가정에선 주인 의식이 고취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는 지시를 잘 따라서 그대로 만들어지는 기성품이나 세공 솜씨와 소재로 소장의 가치가 생기는 공예품 만드는 교육을 넘어서자고 주문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웨이강은 “통치계급을 위한 교육은 표현력, 예술적 감각, PPT 수준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작문 수업에서는 창의력, 감정 표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와 논리를 강조한다”고 밝혔다.

    대안교육에서 학부모들이 바라는 지향점은 글쓰기 능력일 것이다. 필자는 수학 역시 글쓰기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소통하고 논리를 더욱 다듬어 가는 것이 수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국가적인 논술 시험을 위해 수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입증한다. 수학을 못 하면 글을 못 쓴다. 분명, 글쓰기는 글쓰기 교육만으로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여행과 사색이 함께 흘러가고, 무료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자기 부정과 극복이 반복되어야만 좋은 글이 탄생할 수 있다.

    만약 입신양명을 위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순간 본인의 글에는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글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가꾸는 거름과 같다. 마음의 씨앗을 어떻게 뿌리느냐에 따라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마음의 텃밭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물줄기를 지속적으로 보태줘야 한다. 스스로든 아니면 주위에서든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글도 다양하고, 학생들도 다양하다면 글쓰기 교육 역시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한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은 필수다. 지하철에서 읽은 한 편의 시는 글쓰기 교육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게 한다. 고춘식 작가의 ‘봄, 교실에서’이란 시는 “얘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마냥 봄인데 보일 리가 있나요.”라고 노래한다. 학생들이 이미 봄이자, 한 편의 좋은 글이고 좋은 글의 가능성이다.

    * <광주시민저널> 제50호 교육칼럼입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