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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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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10:15 분류없음

4차 산업혁명 관련 전문가들과 국내 과학기술교육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다. 각종 과학기술 경연장, 예를 들면 과학올림피아드나 로봇경진대회 우승자들이 대부분 의대 진학을 희망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 전문가는 그게 왜 나쁘냐고 되물었다. 의대에 가서 로봇 수술을 하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의학을 전공한 후 바이오나 헬스 분야 정보기술(IT) 등 융합 산업에 걸맞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는 반문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가능성이다. 


2018년 4월 22일 한국정보올림피아드(KOI) 개선방안 공청회가 열렸다. 4월 14일 열린 제35회 한국정보올림피아드 지역대회 문제에 오류가 있어 앞으로 어떻게 바꿔 나갈지 고민하는 자리였다. 초등(1문항), 중등(2문항), 고등부(4문항)에서 총 7문제의 오류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해답 없는 문제들을 푸느라 다른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결국 147명을 구제해 본선인 전국대회를 치르게 할 계획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오류의 가능성은 시험의 답안 중 하나로 고려하지 못했느냐는 점이다. 소프트웨어든 정보과학이든 과학기술이든 언제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정보’를 겨루는 대회라면 정보가 제시되는 과정(문제)의 오류를 알아차리는 능력도 물어보면 안 될까. 정답 없음과 복수 정답 역시 가능성으로 열어둘 수 없느냐는 뜻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출제위원의 전문성, 문제에 대한 검증 미숙, 논란이 되고 있는 보편교육과 영재교육의 차이가 아니다. 좋은 소프트웨어교육,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역량은 과연 무엇인지가 핵심이다. 새로운 이름의 대회를 만들고, 다른 출제위원들이 합류한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학생들이 코딩을 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며, 공정한 경쟁과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학생과 학부모들은 일련의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꼈다. 학교가 관료적일 수밖에 없다고 가장 유연해야 할 소프트웨어교육이 ‘하드’해질 순 없다. 


논리적 사고훈련과 소프트웨어교육은 정말 즐거워야만 능력을 꽃피울 수 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교육의 의무화와 이에 따른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담이 늘고 있다. 각종 인증과 대회는 또 다른 사교육을 낳고,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각 문제들의 내용은 차치하고 지역대회가 필기시험으로 치러진 것도 비판이 제기됐다. 아무리 예선대회라지만 소프트웨어 관련 수리퀴즈, 자료구조나 알고리즘 등을 프로그래밍과 컴퓨팅에 연결하는 문제를 종이로 풀어야 하는 것일까. 이건 마치 전국 축구대회에 앞선 지역 예선대회를 필기시험으로 치르는 것과 같다. 헤딩과 패스하는 방법, 골 결정력을 높이는 비결, 축구의 규칙 등을 잘 알아야 필드에서 제대로 뛸 수 있다는 논리다. 소프트웨어와 축구는 둘 다 머리와 몸으로 하는 신체 활동이다. 


자유로움이야말로 소프트웨어의 미래다. 정말 심심풀이로, 재미있어서 만들어 낸 결과물들이 사용자들의 주목을 받는 세상이다. 페이스북이나 구글(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기업들은 탄생과 성장 자체가 자유로움이었다. 이 기업들은 이제 미국 전역의 학교에 소프트웨어교육을 보급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소프트웨어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의 꿈은 실현되기 힘들다. 소프트웨어능력을 어떻게 정답이 정해진 5지 선다형 시험(OMR카드)으로 검증할 수 있을까. 


특히 소프트웨어교육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나의 합리적 판단과 수리적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깨닫는 절차여야 한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인 ‘정보’를 다루는 대회는 소프트웨어 (정보의 구조)의 사고방식을 가꿔가는 축제의 장이 돼야 한다. 나의 능력을 계속 테스트하고 극복하다 보면 훌륭한 프로그래머로 성장할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소트프웨어(SW), 비트(Bit), 인공지능(AI)이란 말이 등장한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객관화(외부화)해 기계적으로 작동시킬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70년도 채 안 된 사이 인공지능이 인간과 사회적 이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훌륭한 수리과학자,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헌신 덕분이다. 


소프트웨어교육과 대회는 창의력을 견주는 장이다. 프랑스의 ‘에콜42’라는 소프트웨어 인재양성소는 입학시험만 한 달 동안 치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진짜 실력을 겨뤄보는 것이다. 각종 장관상과 기관장상들이 소프트웨어학교에 입학하는 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정하게 실력을 겨루는 건 언제나 필요하다. 소프트웨어교육이 ‘하드’한 관료적 대회와 공모전으로 점철된다면 진짜 실력을 겨룰 수 없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10.23 21:48 분류없음

‘춘향전’의 권위적 해석 넘어서는 통찰력이란?

서평_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질문하는 습관이 만드는 생각의 힘』(동아시아, 2018.09)

사유에 대한 독한 책이 나왔다. 바로 인문학자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다. 이 책은 기존의 이야기와 관념,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그 근간을 다시 살펴보고 점검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보를 안(in)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라 밖으로 제거(ex)해야 제대로 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질문하는 힘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과 예술, 정치와 사회 등 전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다.   

흔히 알고 있는 ‘삼고초려’만 하더라도 정말 유비가 제갈량에게 두 번이나 퇴짜를 맞은 것인지 저자는 질문한다.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유비가 제갈량을 떠보기 위해 두 번이나 발걸음을 한 것은 아닌가. 세력 싸움에서 위기에 몰린 유비는 뛰어난 인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추천 받은 제갈량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얘기하는지, 집안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말하는 품성이나 태도는 어떤지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저자 김경집은 리더란 인재를 등용할 때 유비처럼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 책에는 리더십에 대한 얘기가 자주 나온다. 질문하는 힘이란 것도 결국은 대중들의 행복과 올바른 정치를 위한 디딤돌이다. 그래서 통찰력을 지닌 통치자란 말에서 내려와 대중들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한나라의 육가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천하를 다스릴 순 없다고 했다. 한나라의 황제 유방은 그토록 글과 선비를 싫어했음에도 육가의 일침에 귀를 기울였다. 육가는 <신어(新語)>라는 책을 엮어 치세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정치 사회, 직장 사회, 대학 사회에서 눈부신 리더십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최악의 상사는 코디네이트 해야 할 때 큐레이트 하고 큐레이트 해야 할 때 코디네이트 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양하고 적절하게 대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 마디로 지도자는 지혜를 갈구해야 하며 비평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책에는 리더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과 사례가 나온다. 어린이와 여자를 먼저 구한 영국의 세튼 대령. 자식의 죽음을 알면서도 특권을 이용해 시신 송환 조치를 하지 않은 마오쩌둥.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통 큰 기부.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이 차등 부과되는 핀란드 등.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리더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밖에 없다.  


이몽룡은 왜 춘향에게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을까?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춘향전에 대한 다른 해석이다. 저자는 “우리는 권위적 해석에 익숙하고 거기에 길들여지기 쉽다”고 밝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춘향전은 기생 출신 춘향이가 이몽룡에게 정조를 끝까지 지켜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원목사 변학도는 곡물의 집산지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자였다. 변학도는 지방의 유지들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이팔청춘(열여섯) 이몽룡과 춘향이는 낯 뜨겁게 사랑을 나눴다. 변학도는 이몽룡의 부친인 이한림에게 당신의 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기생의 딸과 사귄다는 사실을 일렀을지 모른다. 이몽룡의 부친과 변학도는 결국 이몽룡을 한양으로 유학 보내려는 밀담을 나눈 건 아니었을까. 변학도는 춘향이를 붙들어놓고 수청을 요구했는데, 당시 정황에 따르면 정당한 정치 행위였을 수 있다. 수청(守廳)이란 ‘관청에서 높은 벼슬아치 밑에서 심부름을 하던 일’이다. 물론 지금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요구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 김경집은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춘향이 옥에 갇혔는데 이몽룡은 왜 편지 하나 보내지 않았을까? 아마도 춘향이가 끝까지 절개를 지켰을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천한 기생을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몽룡은 장원급제를 했으면서도 그 소식을 춘향이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았다. 여전히 춘향이를 떠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두 번째 질문은 더욱 심각하다. 막 국가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어떻게 남원목사에게 가서 판을 뒤집을 수 있었을까.     

이 외에도 책에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나 지음지교(知音之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엄밀히 따지만 맹모이천지교가 맞다. 이사를 두 번만 했으니까. 맹자의 어머니는 왜 처음부터 서당이 있는 곳으로 이사하지 않았을까. 또한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을 나타내는 지음지교는 한 방에 소통을 원하는 급격함이 담겨 있다. 점진적인 관계의 성장을 외면하는 건 어리석다는 게 저자의 일침이다.  

오랜 기간 인문학에 천착해온 저자 김경집은 “역사의 유산은 그것이 어떤 분야건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맥락과 배경 속에서 읽어야 하고 그것을 현대의 그것들에 비춰 재해석해야 한다”면서 “이러한 태도와 방식은 비단 오래된 과거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시에서도, 현대사에서도 그건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갈수록 통찰력이 고갈되는 시대에 저자의 일침은 질문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게 습관이 되면 정말로 통찰력이 생길 것이다. 다만, 저자의 말이 정말 맞을지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10.20 17:14 분류없음


프랑스 수학자 로랑 슈바르츠(1915∼2002)는 고등학생 때 본인이 수학을 못한다고 걱정했다. 똑똑하지 못해 수학 문제를 잘 못 푼다고 자책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50년 수학에서 가장 영예로운 필즈상을 수상했다. 슈바르츠는 고전학자와 수학자의 길 중에서 기하학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수학을 선택했다.

여성 최초의 필즈상(2014년) 수상자인 마리암 미르자하니(1977∼2017)는 중학생 때 수학교사의 질타로 인해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기하학의 난제 중 하나인 ‘모듈라이 공간(modulispace)’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필즈상을 받았다. 모듈라이 공간은 기하학적 분류 문제(다른 모양, 같은 위상)에 대한 일종의 해결책이다. 그녀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딴 적도 있다.

위의 두 수학자가 공통적으로 관심을 보인 분야는 바로 ‘기하학’이다. 기하학은 수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분야다. 만물은 모양을 갖추고 있고, 그 모양을 감싸는 공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하학이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를 뿔나게 했다. 2022년 수능에서 수학·과학의 출제 범위를 축소한다는 교육부의 개편안 때문이다.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약학, 의학 등 과학 관련 학회와 단체들은 현재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핵심은 ‘기하’와 ‘과학II’를 수능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목들이 빠지면 이공계의 기초학력이 저하되고 교육기회가 박탈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이 때문에 교육부와 과학기술계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2018년 제59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가 종합 7위를 달성했다. 지난해 종합 1위에 비해 6계단 하락한 것이다. 그동안 꾸준히 순위가 상승해 오다가 갑자기 여러 계단 하락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성적을 대학 입시에 쓸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래서 과학고 학생들이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고민해보면 과연 수학의 위상이 한국에서 어떤지 알 수 있다. 수학은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 목적 자체가 아니다. 수학적 사고가 잉태하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문화가 아니라 계산적이고 기계적인 답습만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인지 한국은 아직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학력 저하의 문제는 ‘기하’와 ‘과학II’의 포함 여부나 국제 대회 성적의 입시 반영에만 있는 게 아니다. 더욱 심각한 건 교육과 평가의 방식에 있다. 

수능에서 수학은 100분 동안 30문제를 풀어야 한다. 수학에 가장 많은 시간이 할애돼 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느끼는 수학 불안은 최고조에 달한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자신의 실력을 최대화해야 하는데 5지 선다와 단답형으로 답안을 이끌어내려면 숨이 막힌다. 수학에선 답이 틀려도 과정이 정확히 맞으면 정답 처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숫자가 틀려도 말이다.

인구의 약 20%가 수학 불안을 느낀다. 수학을 못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평가와 교사들의 방식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다. 당황하면 사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수학을 잘한다는 건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논리적으로 풀어 헤쳐 나간다는 뜻이다. 단순히 정답을 잘 찾는다고 좋은 수학자가 될 순 없다. 그렇다면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평가 역시 유연해져야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언급한 세계경제포럼은 앞으로 필요한 능력 1순위로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을 꼽는다. 그 다음이 창의성이나 협업 능력, 감성 지능, 비판적 사고, 판단력, 유연성 등이다.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의 근간은 바로 수학(數學)의 힘이다.

최근 한 교육 주간지를 보면서 실기시험 없이 체대를 간다는 제목에 눈을 의심했다. 처음엔 의아했으나 ‘와이 낫?(왜 안 되지?)’이라는 물음이 생겼다. 요샌 미대도 실기시험 없이 입학이 가능하다. 물론 모든 전형이 실기가 없는 건 아니다. 학원에서 배운 기능적 실기만으로 미대나 체대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대학은 탁월한 학습 능력을 보인 학생의 예체능적 가능성을 살핀 것이다. 학생의 평상시 관심과 노력의 흔적은 필수다.

미대나 체대에서도 수학·과학적 능력이 매우 중요시된다. 그래서 대학은 전략적으로 내신과 수능 성적에서 등급 컷이 높은 학생들을 선호한다. 현대의 스포츠는 이미 수학·과학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교육정책의 혼선과 잦은 변화, 나쁜 평가 방식 때문에 학생들은 어떤 수학·과학을 공부해야 할지조차 막막하다. 수학 불안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10.18 21:05 분류없음

라다크의 큰 지혜 … 자연을 간접 체험하지 말라

[리뷰]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녹색평론사, 2007)

 

주간지 <시사IN> 최근호(565호)에 라다크 소식이 실렸다. 한 여행작가가 20년만에 다시 다녀온 곳이 바로 라다크의 도시 ‘레(Leh)’이다. 이곳엔 인구 3만 명이 살고 있다. 여행작가가 설명했듯이 라다크는 여전히 오지이지만, 인심과 문화는 변했다.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호텔에는 LED 램프가 켜져 있다. 라다크의 밝기 역시 달라졌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1992년에 출간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오래된 미래』는 작가의 경험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라다크가 문명에 의해 발견되기 전 그곳에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책을 읽어보니, 라다크는 고원의 사막이다. 인도의 최북단 카라코람과 히말라야의 산악에 끼어있다. 중국이 그 옛날 티베트를 공격하자 인도는 라다크에 군대를 파견한다. 그리고 중국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라다크를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한다. 그게 바로 1974년이다. 작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에 따르면, 라다크는 티베트 언어인 ‘라-다그스’ 즉 “고갯길이 있는 땅”의 뜻을 지닌 것 같다고 한다.

 



여전히 오지, 그러나 변한 느낌

 

『오래된 미래』를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일처다부제’였다. 라다크에선 일처다부제와 더불어 일부다체제, 일부일처제 등이 혼합돼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일처다부제가 가능했던 건 남녀노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함께 노동을 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집의 어른은 여자이고, 어머니이다. 아마도 일처다부제가 가능한 것은 라다크 고유의 정신세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돼 있고, 아이가 아이를 기르고, 내 아이와 남의 아이라는 구분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 책에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표현돼 있다.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는 경향이 있는 핵가족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라다크의 가족내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더 넓은 공동체로 확장된다. 때로는 어디까지가 가족이고 어디서부터가 공동체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라다크에선 우리가 그 옛날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친근하고 가깝다. 무엇이 더 낫고 좋다는 호불호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라다크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라다크의 정신세계는 불교에 기반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가 욕망과 욕망에 의한 고통을 불러온다고 한다. 나와 너를 분리함으로써 집착, 특히 사물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이 집착은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하도록 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라다크 불교는 가장 단순하게 보이는 농부부터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듯 보이는 승려까지 모두가 지닌 섬세한 가치관과 태도가 심오하다고 강조했다.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듯한 태도는 무상함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것처럼 작가에게 비춰진다. 집착이 사라지는 건 바로 섬세하면서도 무상무념을 이해한 라다크의 정신세계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라다크인 체링 돌마는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서양의 물질문명에 기반 한 정신세계는 다시, 동양의 이기(理氣)와 마음에 기반 한 정신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다. 마음과 정신 수양이야말로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인정하는 시작이다. 라다크 사람은 이번 생이 유일하지 않다고 믿는다. 삶과 죽음은 영원히 회귀하는 양상으로 간주된다. 삶과 죽음이 화해를 하는 순간이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공부의 시작이다.

 

삶과 죽음은 화해 가능하다

 

불교를 정신세계의 근간으로 두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라다크의 언어는 ‘상대성’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 확실한 건 많지 않다. 라다크의 표현에는 유독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등이 많다. 더욱이, 삶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노인들도 계속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많이 한다. 이로써 노인들은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고 작가는 적었다.

 

세상과 자연을 살피는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삶 속에서 녹아 있다. 개울에서 빨래를 하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어린 소녀가 그곳에 옷을 넣으면 안 된다는 말에 놀란다. 아래쪽 마을 사람들이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소녀는 다른 쪽에 있는 개울에서 빨래를 하라고 조언한다. 그 물들은 밭으로 가기 때문이다.

 

또한 라다크 사람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면 음식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큰 동물이 더 낫다고 하기 때문이다. 가축을 죽여야 하는 일은 매우 무거운 일이고, 용서와 기도 후에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그 나라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지표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머물 때만 해도 이미 라다크는 변화를 겪고 있었다. 서구문물은 라다크의 정신세계를 좀 먹고 있었다. 그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한 라다크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세운 NGO를 중심으로, 라다크의 고유문화, 단순히 문화를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더 지속 가능하게 변화하려는 노력도 병행됐다. 모든 변화가 좋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머무는 게 나은 건 더더욱 아니다.

 

서구인이 라다크의 문화를 겪은 것처럼, 라다크인이 서구문화를 겪은 사례가 책 속에 소개되고 있다. 영국에 두달 정도 다녀온 어떤 라다크 사람은 서구에선 모든 게 간접적이라고 꼬집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도, 화분에 담긴 식물과 플라스틱 가짜 자연을 본다. 벽에는 나무를 그린 그림이 있고, 텔레비전은 언제나 자연의 풍경을 칭송한다. 하지만 서구의 사람들은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일이 드물다. 일이 잔치이고, 자연이 일상인 라다크 사람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즉, 바로 앞에 있는 진리를 멀리, 저 멀리 돌아서 와야만 이해하는 게 바로 우리들은 아닌가.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10.11 17:36 분류없음

보건교사들이 자비로 남아프리카에 간 사연

[리뷰] 『대한민국의 학생과 교사, 아프리카에서 새 희망을 찾다』(전은경 외, 한국경제신문i, 2018.09.)

 

보건교사들과 학생들이 뭉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났다. 총 10박 11일의 일정으로 성인 14명과 학생 9명이 다녀온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아프리카에서 새 희망을 찾다. 언제나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다. 학생들이 교사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환자가 의사와 같이 이겨낸다. 봉사활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프리카가 오히려 봉사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이다.

 

멀고 긴 여정만큼이나 준비 기간도 어려웠다. 일정이 확정되어도 어디를 어떻게 갈지가 문제였다. 심지어 방문하기로 한 흑인학교에서 방문을 불허한다는 연락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사자들은 힘을 냈다. 다시 문을 두드리고 계속 어디 갈지 확인하고 점검을 한 것이다. 이들이 다녀온 곳은 ▶ Kwaggafontein Ematjeni Primary School ▶ 크루가 화이트리버 음솔로지 선교센터 ▶ AIDS 예방 단체 ▶ 케이프타운 한글학교 ▶ 프리토리아 한글학교 ▶ 스텔렌보쉬 대학 등이었다.

 

봉사활동의 주된 내용은 성교육과 보건교육이 주를 이뤘다. 구체적으론 에이즈 예방, 양치질하기, K-pop 등 문화 공연, 태권도 시범, 보디 페인팅, 한글교육 등이었다.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양치질 시범을 보이려고 했는데, 물이 부족해서 직접 다 해보진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아프리카는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수세식 화장실이 지어져 있을 뿐 재래식으로 활용해야 할 정도로 메마른 곳이 남아프리카다.

 



성교육과 보건교육 하지만 부족한 물

 

남아프리카의 학교에선 외부의 아주머니들이 와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다. 어떤 식품인지 검증할 길은 없지만 아이들은 그조차 제대로 사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닳고 닳은 양푼에 감자나 고구마 등을 맨 손으로 집어먹는 아이들을 보자니 마음이 안쓰럽다. 그릇 하나에도 남아프리카의 아픈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아프리카의 학생들은 참 순수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가난이 그들을 더욱 순수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한다. 아이를 키우는 아이들의 모습, 외부의 봉사자들을 반기는 해맑은 눈빛 속에서 남아프리카의 미래를 엿본다. 수만 가지 표정의 아이들을 보며 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걸 함께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남아프리카는 생태계의 寶庫라고 할 만큼 거리에서 많은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동물원에서만 보던 동물들과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봉사자들은 깊은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코뿔소와 코끼리, 아기 표범 등 동물원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들을 남아프리카에서는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봉사는 큰 울림을 주는 듯하다.

 

다만, 『대한민국의 학생과 교사, 아프리카에서 새 희망을 찾다』는 문장이 거칠고 오탈자 등이 눈에 띈다. 가령 29쪽 마지막 문장은 짤려 있다. 또한 너무나 많은 교사와 학생들의 얘기를 담으려고 하다보니 내용이 중복되고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있다. 고생하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열정과 노고는 눈부시지만, 좀 더 정돈되고 필요한 내용들이 담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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