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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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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4. 7. 11:08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다음주 성문밖학교_2018년 봄 트래킹 관련 참고자료(이선희 글쓰기 선생님)를 아래 및 첨부와 같이 올리오니 숙지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7월 8일 갑신일(甲申日) 맑음
    정사와 가마를 함께 타고 삼류하를 건넜다. 냉정에서 아침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를 접어들었을 때였다. 태복이가 갑자기 몸을 조아리며 말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아뢴다.
    “백탑이 현신함을 아뢰옵니다.”
    태복은 정진사의 마두다.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모롱이를 막 벗어나자 눈앞이 어른어른하면서 갑자기 한 무더기의 검은 공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정진사가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의 툭 트인 경계를 보고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지, 그렇구 말구! 아니지, 아니고 말고. 천고의 영웅은 울기를 잘했고, 천하의 미인은 눈물이 많았다네. 하지만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옷깃에 떨굴 정도였기에, 그들의 울음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다 보니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짝지은 것일 뿐이야. 이 때문에 상을 당했을 때 처음엔 억지로 ‘아이고’ 따위의 소리를 울부짖지. 그러면서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소리는 억눌러 버리니 그것이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꽉 뭉쳐 있게 되는 것일세. 일찍이 가생은 울 곳을 얻지 못하고, 결국 참다 못해 별안간 선실을 향하여 한마디 길게 울부짖었다네. 그러니 이를 듣는 사람들이 어찌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정진사가 다시 물었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기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펼쳐진 끝없는 땅, 요동벌판의 풍경과 마주한 박지원은 그곳을 “훌륭한 울음터”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좁은 뱃속에서 지내다가 넓은 세상으로 나와 크게 울 듯이, 새로운 풍경 앞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느낀 것 아닐까요? 이 글의 키워드는 ‘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공항에 내려 터미널 안으로 불과 몇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나는 천장에 걸린 안내판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그것은 입국자 대합실, 출구, 환승 수속 창구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다. 밝은 노란색 바탕에, 높이는 2미터, 가로는 2미터 크기다. 디자인은 단순하다. 불을 밝힌 알루미늄 상자 안에 든 플라스틱 간판일 뿐이다. 이 상자는 전선과 공기 순환용 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천장의 강철 버팀대에 매달려 있다.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세속성에도 불구하고, 이 간판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이국적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릴 것 같은 즐거움이다. 이국적 정서는 특정한 곳에서 나온다. Aankomst(도착)에서 a를 두 개 쓰는 것에, Uitgang(출구)에서 u와 I가 잇달아 나오는 것에, 외국어 밑에 영어가 쓰여 있는 것에, ‘접수대’라는 말을 쓸 곳에 balies라고 쓰는 것에, 프루티거체나 유니버스체 같은 실용적이면서도 모더니즘 냄새가 나는 글자체를 사용한 것에.

    그 안내판이 나에게 진정한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첫 번째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영국의 안내판은 절대 그런 식이 아니다. 영국에서라면 노란색이 좀 옅을 것이고, 활자체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부드러운 쪽이었을 것이고, 외국 사람들이야 혼란을 느끼건 말건 외국어 표기는 하지 않을 것이고, 글자에 a가 이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 a의 반복에서 나는 다른 역사, 다른 사고방식의 존재를 느끼며 혼란을 경험한다.
    플러그 소켓, 욕실을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사실 스히폴 공항의 안내판을 만든 나라는 영국과는 아주 다른 나라인 것 같다. 민족의 특성을 연구하는 대담한 고고학자라면 이런 글자체의 연원을 20세기 초의 드 스틸 운동(de sitijl 운동. 영어로는 the Style. 1917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잡지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몬드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추상 회화 운동)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눈에 띄는 영어 병기의 연원은 네덜란드인의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1602년 동인도회사의 건립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안내판의 전체적인 단순성의 연원은 16세기 동맹제주(1579년 위트레히트 동맹으로 연합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네덜란드 북부의 7개주)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 동안 네덜란드의 민족성의 일부를 이루게 된 캘빈주의적 미학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장소에서 안내판이 이렇게 다르게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유쾌한 생각을 입증해준다. 나라는 다양하고, 국경을 넘어가면 관행은 변한다는 것. 그러나 차이만으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적어도 오랜 시간의 기쁨은, 그 차이가 영국에서 가능한 것보다 더 나아 보여야 한다. 내가 스히폴 공항의 안내판이 이국적이라고 느낀 것은 이 안내판으로부터 그것을 만든 나라, 공항의 아위트강 너머에 있는 나라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영국보다 내 기질과 관심에 더 맞을 것이라는 암시, 모호하지만 강렬한 암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공항의 안내판을 보고 알랭 드 보통은 그것이 “내가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첫 번째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합니다. 사소한 사물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겠지요? 이 글의 키워드는 ‘안내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음악에 맞춰 한 걸음 내딛자 소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소녀는 나보다 먼저 다음 동작을 치고 나갔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섬의 전통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전통음악이라니 살짝 실망했지만 춤은 밀도 있게 이어졌다. 춤이라고 보기엔 민망한 율동에 가까웠다.
    소녀와 나는 말이 안 통했다. “우리 이렇게 돌래요?”라고 전달하려면 10초 동안 웃으면서 “응응?” 하고 동작을 보여 주고 상대가 “씨(si, 네)” 하고 수줍게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쉬운 세 가지 동작을 선택해 계속 반복했다. 서로 마주한 채 가슴을 맞대고 180도 돌기, 함께 팔짱 끼고 360도 돌기,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상대의 정수리에 오른손 올리고 상대만 세 바퀴 돌리기.
    섬의 할아버지들로 구성된 악단이 가끔 듣기 좋은 소음을 내면서 연주를 했다. 어떤 악기들이었는지 어둠 속에 있어서 잘 못 봤지만 타악기, 관악기, 현악기가 고루 조화된 것처럼 들렸다. 퐈앙퐈앙, 삐삐삐, 칙칙, 소녀는 악기 소리에 맞춰 오래 춤을 췄던 것처럼 나를 리드했다. 춤은 반드시 남자가 리드해야 한다고 스페인어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했던 게 생각났지만 소녀가 더 잘할 수 있다는데 내가 굳이 나서는 건 남자의 자존심 운운하는 마초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소녀에게 몸을 맡겼다.
    소녀는 내가 동작을 틀릴 때마다 수줍게 웃었다. 평소 나였다면 부끄러워 바로 자신감이 떨어지고, 비례해서 동작의 크기도 작아지고, 그래서 또 실수를 연발하는 악순환에 풍덩 빠졌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춤의 모든 걸 책임진 소녀가 나와 춤을 계속 추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추기 싫었다면 내 실수에 차가운 무표정이나 미간의 주름 한 번쯤 날려 주었을 거다. 나는 동작이 틀릴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어 그녀의 호의에 답했다.
    소녀는 꽃이 화려하게 수놓인 상의를 입고, 꽃송이처럼 생긴 털방울 모자를 쓰고, 머리를 곱게 넘긴 채 하이라이트로 개나리색 치마를 휘날렸다. 서울에선 촌스러운 패션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섬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쁜 전통의상이었다. 소녀는 그 작은 섬에서 가장 어렸고, 미혼인 여자들만 가장 화려하고 매혹적인 색의 치마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여성들은 붉고 칙칙한 단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홀로 개나리색 치마를 나풀나풀 날리고 있었다.

    문제는 내 신발에서 터졌다. 꿍짝꿍짝 발이 잘 맞아 가던 찰나 내 오른쪽 신발의 끈이 확 풀려 버린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탐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신고 온 육중한 등산화였다. 춤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끈을 묶지 않기로 했다. 괜히 끈을 묶다가 좋은 흐름을 놓쳐 버리면 궤도를 잃은 지구와 달처럼 허망한 신세가 될지 몰랐다. 예민하게 발가락 끝에 힘을 줬다. 지구와 달은 충돌하지 않았고 우리의 춤은 계속되었다.
    - 로드스꼴라, <로드스꼴라,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 중에서   

    → 이 글은 여행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에 다니는 학생이 쓴 것입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일 것 같습니다. 실수를 해도, 신발끈이 풀어져도 소녀와의 춤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 글은 키워드는 ‘춤’이겠지요?


    말하자면 내 얼굴은 1시 50분이다. 시계 바늘이 둘 다 위로 뻗친 모습이랄까?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 때문에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화난 얼굴 같아 보인다. 나이가 들어 눈매가 처지는 것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종종 인상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내가 잘 웃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못되게 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 그런가, 나는 좀 착하게 보이고 싶은 콤플렉스가 있다. 성형할 용기는 없고(실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착해 보이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웃는 것이다.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고, 적당히 반응하고, 적당히 웃으면 사람들은 곧잘 인상 좋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심한 경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웃느라 아픈 턱을 쉬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한다. 그럴 때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은 그렇게 못돼 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착하게 보이기 위해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배꼽 있는 데까지 푹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웃는 인상이 참 좋다’라는 칭찬은 내게 달디 단 독약과 같았다. 한번 좋은 인상을 심으면 늘 좋은 인상이고 싶고, 어쩌다 얼굴 찡그린 일이 있으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웃는 얼굴이 늘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진짜 즐거워 웃을 때도 있지만, 즐겁지 않을 때도 이왕이면 웃고 싶었다는 것이다. 필리핀 공정여행을 떠나면서 35리터 배낭을 준비했다. 이것이 필요하면 저것도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면 이것도 필요한 멍청한 짐 꾸리기 덕분에 배낭은 터질 듯 무거웠다. 배낭 외에 준비한 것은 하나 더. 낯선 사람,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 앞에서 빠질 수 없는 웃는 얼굴. 이 얼굴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꺼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웃는 얼굴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첫 아침. 나는 홀로 길을 나섰다. 필리핀 국립대학 안에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사람이 사는 동네가 나온다(신기하게도 대학 안에 마을이 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도 골목도 개도 집도 모두 내가 아는 단어지만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기만 하다.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은 게으를 것이다’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꼬마들, 할머니들,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 웃통을 벗은 중년 남자, 소년들, 청년들 할 것 없이-심지어는 닭도, 개도 모두 길에 나와 서 있었다-길은 밖이 아니라 곧 집인 것 같았다. 모두가 함께 사는 집.
    나는 마치 남의 집에 방문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주뼛거리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채 걷고 있었다. 25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하신, 10년 전부터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낡은 수동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감히 셔터를 누르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Good morning!” 당황한 나는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 했다. 그런데 뒤이어 누군가 또 인사를 건넨다. “Good morning!” 그렇게 그날 아침의 인사 행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누군가는 담에 기댄 채로, 누군가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그들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미소로만 답하던 나도 조금씩 입을 달싹거려 보았다. “Good morning!”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Good morning!” 그러면 그들은 여지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인사에 답을 해주었다.
    그들의 미소에 이유가 있었을까? 낯선 이방인에게 잘 보일 필요 따위 없는 그들의 미소는 ‘그냥’ 미소였을 것이다.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이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가벼운 염원 같은 인사. 그러니까 말하자면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는 ‘백화점 미소’가 아니고 ‘골목길 미소’라고나 할까. 백화점 판매원들은 항상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하지만 그 너머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골목길에 나와 선 사람들이 나에게 건넨 인사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필리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매끈한 백화점 바닥보다 우둘투둘한 골목길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토박이이고, 그들이 이방인인 한국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곁을 지나는 동남아시아 사람에게 미소로 인사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사에 인색하고 미소에 야박한 한국인인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길을 잃었다. 큰 길은 작은 길로 갈라지고 작은 길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그 끝에서 농구를 하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필리핀 사람들은 농구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터를 내어 만든 작은 농구 코드에서 1인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 역시 내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마주 인사한 뒤 그를 지나쳐 가려다 용기 내어 길을 물어보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더니 남자는 내 손에 든 카메라를 보고는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한다. 슛하는 동작을 취하는 그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필리핀에서의 첫 날, 내게 인사를 건네던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무리 웃어도 결코 턱이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웃음은 억지웃음이 아니니까. 내 웃는 얼굴 때문에 나를 꺼려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행 중반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내 억지웃음, 아니 억지라는 표현은 너무 가혹하니까 ‘애써’ 웃음이라고 하자. 내 애써 웃음을 처음부터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부류였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그들 역시 나에 대한 편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과 사람과 나 자신에 대한 편견마저 뛰어 넘고 싶었던 필리핀 공정여행. 이제 하루가 지났다.
    - 이선희, 희망제작소 연재 ‘편견을 넘어’ 중에서
    (원문보기: http://www.makehope.org/?p=2688)

    → 이 글은 제가 쓴 것입니다^^ 필리핀으로 공정여행을 갔던 첫 날의 인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여행자에게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필리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이 글의 키워드는 ‘미소’입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