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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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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5. 30. 15:49 카테고리 없음

    * <광주시민저널> 제51호 교육수기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각 대안학교들마다 미디어에 대한 고민이 많다. 한마디로 과한 스마트폰 사용 때문이다.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요즘 학생들, 더 나아가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다. 실제로 최근 통계에 따르면, 조만간 인류의 50억 명이 스마트한 모바일 폰을 휴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인구는 약 75억 명이다. 3000억 회 이상의 애플리케이션(앱) 다운로드가 이뤄졌고, 수십만 개의 앱퍼블리셔(앱을 만들어 배포하는 회사)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사이버 물리 시스템’의 3C가 핵심이다. 물리적 자연 세계와 인터넷으로 통용되는 사이버 세계가 서로 소통하며 정보를 주고받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3C는 계산(Computation),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컨트롤(Control)이다. 가까운 미래 및 현실의 세계를 계산하고, 나의 의지와 소통하며, 기계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세상이다. 스마트폰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다.


    세상은 급변, 다변화 하고 있다. 미디어는 진화하고 있으며 콘텐츠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싫증이 나면 금방 앱을 꺼버리고 게임을 지우면 된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뇌구조 역시 설정(Set)과 재설정(Reset)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인간의 관계 역시 금방 새롭게 관계를 형성하였다가 필요가 다 하면 지워지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학생들은 어떠한 미디어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대안교육은 미디어에 대한 어떤 교육을 해야 혹은 하지 말아야 할까? 언제나 고민이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 미디어는 결국 소통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미디어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노트북, 태블릿PC, TV, 종이와 연필 등 다양하다. 소통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미디어(media)는 미디움(medium)의 복수 어이다. 미디움은 원래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뜻을 지녔다.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바로 미디어인 것이다.


    미디어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미디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며, 미디어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직업을 얻는 가능성이 열린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대안교육에서 미디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질적인 차원이 조금은 달라진다. 학생들의 개성과 성장을 고려하면 미디어를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 미디어는 일상에서 늘 접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기체와 같이 사용된다.


    수학을 생각해보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풀거나 그래프를 미디어로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를 이해하는 건 결국 우리의 머리다. 수학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설계(아키텍처)하는 인재가 필요하다. 앞으론 누구나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지만, 아무나 그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미디어의 활용은 중요하지만, 미디어를 만들고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미디어의 속성을 이해하고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가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간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건 너무나 재미있다. 이제 자연과학과 산업기술, 인문학과 사회과학, 경영학과 예술은 미디어 없이 발전할 수 없다. 그런데 누구나 활용 가능하다면, 즉 누구나 제 손에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쥘 수 있다면 어떤가? 적어도 파워유저(자유자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필요시 자신에게 적합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사용자) 이상이 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을 직접 코딩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변용하고 연결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말로 우선 머리로 논리를 이해하고, 수학의 깊이를 맨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더불어, 대안교육에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디지털 격차이다. 다함께 같은 출발선에 서야 한다는 점(과정)은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은 디지털 격차의 속성이다. 앞으론 분명 디지털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잘 활용하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다. 코딩을 하고, 내 맘대로 변동해서 활용할 수 있느냐, 업데이트 혹은 업그레이드를 신속히 하여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디지털 격차가 발생할 것이다. 누구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활용할 수 있지만 맞춤형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인재가 되려면 수학의 진수를 느껴야 한다. 수학을 잘 하려면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며 다양한 사고가 가능해야 한다.


    성문밖학교에선 수업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 적 있다. 결론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분명한 건 디지털 격차를 막을 순 없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다. 학업 격차는 고스란히 미디어를 잘 다루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확장될 것이다. 물론 일부는 학업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미디어를 찾아 갈 것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면 말이다. 미디어 도입과 활용에 대해 시기상조란 말로 혹은 형평성이라는 개념으로 아니면 감성과 손의 감각에서 나오는 학업이라는 차원에서도 미디어를 규정할 순 없다.


    성문밖학교에서 미디어는 이미 학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주어져 있다. 교육용으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인터넷을 활용하거나 수업 시간에 연필과 노트를 쓰는 것 자체가 미디어를 쓰는 일이다. 동아리 시간에 노트북을 쓰고, 방과 후 일부는 선생님의 동의를 얻어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 미디어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 혹은 교육 일반에서 중요한 건 미디어의 전적인 활용여부라기 보다는 자율과 약속 그리고 계획과 자제(중용)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성장을 논할 수 있다.


    『콘텐츠의 미래』(리더스북, 2017. 11)의 저자 하버드 경영대학원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확장되는 콘텐츠의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네트워크는 더욱 유기적으로 진화할 것이고, 각자 가지고 있는 노하우는 공개되고 공유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열렸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이 성공했으며, ‘디지털 대화재’라고 일컬은 현재이자 미래의 세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그런데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단순히 콘텐츠를 네트워크화 하고 공개하는 게 전략은 아니라고 밝혔다. 철저한 계획과 정교한 가이드와 함께 공개와 공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미디어를 어떻게든 도입하고 활용해야 하는 대안교육이라면 역시 교육의 차원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자율과 약속, 계획과 자제가 없는 미디어 남용이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미디어를 활용하되 건강하게, 미디어를 도입하되 계획적으로 접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면, 그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며 어떤 맥락을 지녔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던져지는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폭력이다. 미디어는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미디어는 정말 중요하다. 미디어를 잘 다루는 건 더욱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건강한 미디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건강한 미디어 교육은 때론 미디어보다 앞서서 이뤄져야 할 수도 혹은 미디어 없이 먼저 숙고해야 할 필요도 있다. 미디어를 다루는 건 결국 사람(학생)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5. 1. 16:04 카테고리 없음

    대안교육과 글쓰기, 학생들이 이미 좋은 글이다

    지난 4월 둘째 주 성문밖학교 학생들은 강화도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강화도의 석모도 자연휴양림을 숙소로 삼고, 전등사와 연미정에 오르고 석모대교를 건넜으며 고려산 진달래꽃들을 둘러봤다. 또한 고인돌유적지와 평화 전망대에서 사진작가인 이시우 선생님을 통해 나를 낮추고 상대방 아래에(under) 서서(stand) 서로를 이해(under+stand)하는 지혜를 배웠다. 특히 수려한 봄 날씨는 그야 말로 선물이었다.

    성문밖학교는 강화도 여행을 기행문으로 작성하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성문밖 여행 공모전’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글을 잘 쓴(?) 학생들을 격려했다. 모든 학생들이 기행문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고 각 교사들이 공정한 심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 가운데 과연 글을 잘 쓴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차원을 넘어 ‘글쓰기’는 대안학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글쓰기는 줄타기와 같다. 긴장감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글에는 본인의 품성이 고스란히 베어난다. 이성 혹은 감성이 풍부한지, 주변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고민은 어느 정도 해보았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희망적인지 혹은 비관적인지, 퇴고는 여러 번 했는지 등. 글쓰기는 아마도 삶을 관통하는 의지이자 자신의 내공을 드러내는 집적체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너무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서도, 힘을 주어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연’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처럼 글 역시 내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글쓰기 관련 두 영화가 있다. 하나는 <더 챔프(Resurrecting the Champ)>(2007)이다.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주인공은 글쓰기를 링 위에 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건 언제나 두렵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인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고 자신의 모든 게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시선들을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잘못된 정보로 기사를 쓴 후 온갖 지탄과 두려움에 직면한다. 주인공은 링 위에 홀로 선 권투 선수와 같았고, 큰 펀치를 맞은 셈이다.

    다른 영화는 <파인딩 포레스터>(2000)다. 이 영화는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J.D. 샐린저의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 통에 형제를 잃은 주인공은 홀로 은둔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한 빈민가의 흑인 소년을 만나면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흑인 소년은 가정의 상처를 글쓰기로 승화 하며 남다른 솜씨를 갈고 닦아 왔다. 작가는 작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주인공은 흑인 소년에게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글을 쓸 때 생각부터 하려고 하지 마라. 생각은 나중에 떠오른다. 우선 가슴으로 써라. 그 다음에는 머리로 고쳐서 써라. 글을 쓰는 첫 번째 열쇠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우선 가장 중요한 건 글에 다양한 색깔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모든 글을 잘 쓸 수 없다. 악기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많은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에는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글, 감상적이고 사색적인 글, 공상적이고 역사적인 글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다. 어떤 글은 보고서가 되고, 어떤 글은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글이 된다. 어떤 글은 채택이 되고, 또 어떤 글은 채택이 되지 않기도 한다. 기행문이 있고, 일기가 있으며, 독후감이 있다. 글은 다양하다.

    다양한 색깔은 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학생들 역시 매우 다양하고 다르다. 최근 읽은 <지식인 복잡한 세상을 만나다>(완웨이강, 애플북스, 2018.03)은 현대교육의 컨베이어 벨트식 시스템을 비판한다. 학생들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유전자가 전부 다르다. 특히 생년월일부터가 다 다르다. 태어난 날이 다르기 때문에 학업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인 완웨이강은 “발육 정도가 모두 다른 학생을 한자리에 놓고 훈련시킨다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상적인 교육모델은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라 수업이 진행되는 1대 1 학습법, 이른바 눈높이 교육”이라고 적었다.

    완웨이강은 현대의 교육체계가 소득 수준과 가족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점을 드러냈다. 소득이 많고 대화가 많은 교양 있는 가정에선 주인 의식이 고취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는 지시를 잘 따라서 그대로 만들어지는 기성품이나 세공 솜씨와 소재로 소장의 가치가 생기는 공예품 만드는 교육을 넘어서자고 주문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웨이강은 “통치계급을 위한 교육은 표현력, 예술적 감각, PPT 수준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작문 수업에서는 창의력, 감정 표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와 논리를 강조한다”고 밝혔다.

    대안교육에서 학부모들이 바라는 지향점은 글쓰기 능력일 것이다. 필자는 수학 역시 글쓰기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소통하고 논리를 더욱 다듬어 가는 것이 수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국가적인 논술 시험을 위해 수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입증한다. 수학을 못 하면 글을 못 쓴다. 분명, 글쓰기는 글쓰기 교육만으로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여행과 사색이 함께 흘러가고, 무료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자기 부정과 극복이 반복되어야만 좋은 글이 탄생할 수 있다.

    만약 입신양명을 위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순간 본인의 글에는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글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가꾸는 거름과 같다. 마음의 씨앗을 어떻게 뿌리느냐에 따라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마음의 텃밭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물줄기를 지속적으로 보태줘야 한다. 스스로든 아니면 주위에서든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글도 다양하고, 학생들도 다양하다면 글쓰기 교육 역시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한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은 필수다. 지하철에서 읽은 한 편의 시는 글쓰기 교육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게 한다. 고춘식 작가의 ‘봄, 교실에서’이란 시는 “얘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마냥 봄인데 보일 리가 있나요.”라고 노래한다. 학생들이 이미 봄이자, 한 편의 좋은 글이고 좋은 글의 가능성이다.

    * <광주시민저널> 제50호 교육칼럼입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4. 17. 05:45 카테고리 없음

    * <광주시민저널> 제49호에 실린 교육칼럼입니다.

    최근에 한 학생과 우연히 상담을 진행했다. 현재 나이는 20살인데, 고등학교 3학년으로 성문밖학교에 다니고 있다. 고민이 많았고 방황을 좀 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청소년 시기에 1∼2년은 매우 예민한 시기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늦은 게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강조해도 어떻게 이해하랴. 그래도 상담을 해주는 교사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얘기를 나눴다.

    그 학생은 수학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놀란 사실이 있다. 예제 문제를 답을 보며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수학 공부를 답을 보며 공부하다니. 다행히 확인 문제나 연습 문제는 직접 도전해보고 있었다. 절대 수학 문제를 답보면서 공부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여러 번 고민을 해본 후에, 정말 마지막에야 모르는 문제에 대해 답을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수능 시험을 목표로 공부 중인 그 학생은 마음이 급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은 공부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제1순위는 바로 ‘조바심(조급함)’이라고 했다.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바심을 물리치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상담을 마치면서 일주일 정도라도 좀 쉬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인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보자고 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를 해보자고. 며칠이 지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행복한 수학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긴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공부하는 게 즐거워야 하는데, 억지이자 고통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배우는 것인데, 공부가 학생을 우울하게 하다니. 그런데 행복한 수학을 발견했던 적이 있다.

    이번 겨울에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라는 어른들의 수학 공부 모임에선 일본인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 씨를 데려와 3회 수학콘서트를 연 바 있다. 모리타 마사오 씨의 책은 『수학하는 신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을 읽다가 직접 저자를 데려와 수학콘서트를 개최한 것이다. 국내엔 거의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3박 4일간 모리타 마사오 씨는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개최했다. 수학교육의 혁신적인 모습을 보인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모리타 마사오 씨와 함께 한 수학콘서트는 대한민국에서 수학교육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그동안 수학교육은 획일화의 공교육과 지나친 사교육이 이끌어왔다. 그런데 겨울에 열린 수학콘서트는 다른 수학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의미가 상당하다. 다른 수학이란 계산 문제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깊이에 맞닿아 보는 것이다.

    모리타 마사오 씨가 주목한 전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수학 시간에 그림을 계속 보도록 했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정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매시간 그림만 하염없이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으면, 수학적 사고에서도 사고를 확장하고 깊은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계산만 하다보면 사람은 이기적일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하고 깊은 사고가 가능하다면 공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후부터는 시간만 있으면 학습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조는 경전을 인용해 매사에 정성을 다하라고 신하들에게 당부했다. 마음가짐이야말로 공부의 출발이다.

    수학콘서트는 수학교사들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행복하게 수학콘서트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구체화 한 것이 바로 수학콘서트였다. 스토리펀딩으로 3백여 만 원을 모으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하고 도움을 주면서 응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수학콘서트였다. 특히 『수학하는 신체』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 씨와 역자 박동섭 박사가 함께 해서 더욱 즐거웠다. 필자는 마치 일본의 만담(漫才)을 보는 듯한 유쾌함을 느꼈다. 모리타 마사오 씨는 학생들과 함께 수학을 활용해 상상하고 정서를 쌓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계산보다 정서가 훨씬 더 가능성 있는 교육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 모임에선 올해 국내 수학자 혹은 수학교사와 함께 수학콘서트를 개최해보려고 한다. 모임의 수학교사들과 활동가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펼쳐볼 수 있도록,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대안 모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준비해볼 예정이다. 물론 사전에 더욱 많은 논의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수학, 행복한 수학을 찾아서 다시 여정을 떠날 것이다.

    상담을 했던 학생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동서양의 철학자인 공자와 칸트는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칸트는 지성이 배제된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배제된 지식은 공허하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갈수록 이 말들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친 듯이 공부만 해서도,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고 생각만 많이 해서도 안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답을 보면서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 늦었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신속히 따라잡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물어보고 싶은 건 정말 그렇게 하는 게 행복하냐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노력하며 고민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공부라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복한 수학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어른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환경 탓만 하기엔 학생들의 마음이 너무 소중하고 안쓰럽다.

    수학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빅데이터와 SW는 모두 수학에 기반하고 있다. 내가 왜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내게 행복한 수학은 무엇일지, 행복한 공부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다함께 더 고민해보길 부탁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세상은 의미를 상실할 수 있고 중심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찾아야 한다. 행복한 수학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고 행복을 위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