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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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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9. 6. 16:23 카테고리 없음

    <TED ed>의 교육혁신이 놀랍다. ‘수업은 공유할 가치가 있다(Lessons worth sharing)’는 철학으로 운영되는 <TED ed>. 온라인 교육플랫폼인 이곳엔 24만3천84개의 교육콘텐츠와 1천4백81만 여개의 질문, 그리고 이에 대한 댓글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2차원의 사각형이 3차원의 구를 인식하는 모습. 

    이처럼 <TED ed>에는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학습콘텐츠가 매우 많다. 

    디자인과 스토리텔링, 내용은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신뢰할 수 있다. 

    사진 = <TED ed> 동영상 캡처. 


    가히 교육혁명이라 할 만큼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친 <TED ed>는 과학기술, 의학, 수학, 역사, 심리학, 철학 등 교육의 대부분 영역을 다룬다. 유튜브와 연동돼 접근이 용이하고 28개의 언어로 번역돼 이해하기 쉽다. 한국어를 포함한 몇몇 언어는 계속 번역 작업 중이다.

     

    2012년 시작된 <TED ed>는 <TED>의 기반 하에 파생된 여러 플랫폼 중 하나다. <TED>는 아이디어가 태도, 삶, 궁극적으로 이 세계를 바꿀 힘이 있다고 열정적으로 믿고 있다. <TED>는 <TED 컨퍼런스>, <TED X>, <TED 북스>, <TED 펠로우 프로그램>, <TED 오픈 번역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대돼 왔다. <TED ed>는 교사를 지원하고 전 세계 학습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운영 중이다. ‘ed’는 교육(education)을 뜻한다.

     

    <TED ed>의 특징은 애니매이션 동영상을 통한 교육콘텐츠 제공에 있다. 한마디로 재밌다. 전 세계 2만5천 명의 교사들이 학생들과 상호작용하는 수업을 하도록 도와준다. 학생들은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키우며 학습의 차원에서 호기심을 배양할 수 있다. <TED ed>를 만드는 사람은 다양하다. <TED> 연사, 연구원, 교육자, 디자이너, 애니메이터, 시나리오 작가, 감독, 과학 작가, 역사학자, 언론인, 편집자 등이 창의적인 협력관계를 쌓아간다. <칸 아카데미>로 유명한 살만 칸도 참여하고 있다.

     

    호기심 불러오는 재밌는 학습 콘텐츠

     

    교육자 알렉스 로젠탈과 조지 자이단가 만든 ‘다른 차원을 경험한다는 것’이라는 콘텐츠를 보자. 이 학습 콘텐츠는 실제로 귀여운 2차원 정사각형이 3차원의 구를 만나서 여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차원의 구는 4차원의 존재를 고민하고 상상한다. 차원은 방향이고, 차원이 형성되려면 다른 모든 차원과 수직을 이뤄야만 한다. 1884년 신학자이자 교육자인 에드윈 에벗은 <플랫랜드(이상한 나라의 사각형)>를 집필한다. 그는 2차원 세계에 있던 정사각형이 3차원 세계의 원과 함께 여행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그렸다.

     

    이 동영상과 관련된 오픈 토론을 보면, 창의적인 생각을 펼칠 수 있다. 3차원의 존재에겐 없지만 4차원의 존재가 갖고 있는 것을 무엇일까? 4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보다는 분명 더욱 현명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댓글들을 보면, 한 네티즌은 4차원의 존재들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과거나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적었다. 공룡이 멸종된 이후나 우주 탄생 이후의 모습, 혹은 내가 다음에 무엇을 먹거나 언제 죽을지 등을 안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이유에 대한 7가지 이론

     

    또 다른 학습콘텐츠를 보자. 꿈을 꾸었다는 기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기원전 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왕들은 꿀을 밀랍 판에 기록했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꿈과 해석을 책에 썼다. 교육자 에이미 에드킨스의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는 7가지 이론을 설명한다.

     

    어젯밤 우리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와 만나 싸웠거나, 홀로 여행을 떠났거나, 사람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때로 악몽을 꾸기도 한다. 악몽은 꼭 귀신이 나오는 공포심만 주지 않는다. 가족이 죽었거나, 직장에서 잘리는 꿈, 길을 가다가 얻어맞는 꿈,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꿈에서 반복되는 경우처럼 슬픔, 혼란, 분노, 혐오, 죄책감으로도 나온다.

     

    꿈에 따라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좋거나 나빠진다. 꿈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즉, 10대와 40대는 나이가 다르며, 고기를 즐기는 사람과 채소만 먹는 사람, 그리고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꾸는 꿈은 달라진다. 꿈은 잠을 자는 모든 시간동안 꾸는 것이 아니다. 잠은 주기가 있는데, 그 중 렘수면 상태일 때 꿈을 꾸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잠을 자는 동안 보통 4개~6개의 꿈을 꾼다. 대부분의 사람은 깨어나자마자 꿈의 내용을 잊어버린다.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인지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꿈을 꿀까.


    첫째는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는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이란 깨어 있는 동안 보았던 것들의 모음이자 욕구이다. 예를 들어 옆집 여자와 뽀뽀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경우 꿈에서 이루게 된다. 꿈은 무의식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기억하기 위해서다. 한 가지 공부나 일을 마친 경우 다른 공부나 일로 바로 넘어가기 보다는 잠을 자면 좋다. 2010년 미로 실험의 경우도 미로에 대한 해결법을 생각하다가 잠을 잔 그룹의 경우 10배는 더 잘 해결했다는 결과가 있다. 잠을 자는 동안 기억과정들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셋째는 잊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깨어있는 동안 많은 것은 보고, 듣고, 느낀다. 이 중 필요 없는 뉴런 연결들은 잠을 자는 동안 제거된다. 쓸데없는 연결을 없애는 것이다.

     

    넷째 뇌의 기능을 위해서다.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자극을 줄이고 기억 저장소의 데이터를 정리하여 뇌가 올바르게 기능을 하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섯째 실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꿈에서 도둑과 싸우거나, 벼랑에 매달리는 둥 위험한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실제 상황을 연습하는 것이다. 실제 생식 본능을 연습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여섯째는 회복을 위해서다. 예를 들어, 가족을 잃었거나 사고를 당하여 트라우마가 생긴 경우 꿈을 꾸면 치료가 된다. 스트레스 관련 신경 전달 물질이 꿀을 꿀 때 덜 활성화되는데 이로 인해 조금씩 트라우마에 무뎌지는 것이다. 즉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완화된다. 실제로 정서장애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수면장애가 있어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이는 꿈을 꾸는 시간이 적은 것이며, 때문에 트라우마를 완화할 기회가 적어진다.

     

    일곱째는 문제해결을 위해서다. 꿈을 꾸는 동안 소설의 소재를 얻거나 화학식을 발견하는 등 실제로는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한 사람들이 많다. 평범한 현실과 달리 자유로운 꿈속이기에 가능하다. 위의 7가지 이론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꿈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점은 확실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잠을 자야 한다.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TED ed>의 교훈이다.

     

    <TED ed>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고민할 거리를 주고 이를 시각화 한다는 점이다. 또한 직접 프레젠테이션 할 수 있도록 이끌며 교사와 학생들이 상호작용할 여지를 준다. 앞으로 교육이 이 <TED ed>만 활용해도 충분할 것 같다는 짐작을 해본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7. 9. 22:29 카테고리 없음
    #1. ‘감자(강아지)’가 성문밖학교를 떠났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감자’는 어렸을 때 저 멀리 부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왔다. 그랬던 ‘감자’는 이제 입양돼 캐나다로 갔다. ‘감자’의 운명은 먼 곳을 여행하는 것인가 보다. 학생들은 강아지를 떠나보내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동안 강아지를 사랑하고, 강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느꼈을 정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2.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 토끼는 겨울 동안 성문밖학교 안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이제 울타리와 흙이 곱게 깔린 새집을 얻었다. 굴을 파는 게 습성인 토끼는 여기저기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새끼를 한 번 낳았다가 잃어버린 토끼는 따뜻한 햇살과 함께 행복을 되찾았다. 학생들은 새끼를 잃는 게 어떤 것인지 지켜보았다. 새로운 생명은 굴을 통해 성문밖학교를 파헤치고 다닌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3. 성문밖학교를 지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당나귀를 구경하러 불쑥 찾아온다. 남한산성 길을 가다보면 저 멀리서 하얗고 까만 당나귀 두 마리가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실례를 무릅쓰고 성문밖학교에 들어온다. 당나귀를 본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성문밖학교 학생들은 매일 당나귀와 교감한다. 암컷은 까맣게 보이는 짙은 갈색이어서 ‘깜지’라고 불린다. 수컷은 털이 하얘서 ‘하당’이다. 암컷이 수컷보다 몸짓이 훨씬 크다. 풀을 뜯기 위해 운동장 울타리를 자주 벗어나는 ‘깜지’와 ‘하당’이. 수업을 하다보면 가끔 하얗고 시커먼 당나귀들이 창문 밖을 지난다. 학생들은 ‘와!’하고 함성을 지른다. 당나귀들의 털을 고르는 것부터 똥 치우기, 물과 먹이주기 등 자잘한 일들을 돌아가면서 한다. 동물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동물을 사랑하는 일은 그 어떤 교육보다도 훌륭하다. 

    #4. 가끔씩 ‘음매 음매’하는 소리가 성문밖학교 안에 울려 퍼진다. 바로 염소인 ‘별이’와 ‘달이’가 우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헷갈린다. 누가 암컷이고 수컷인지 말이다. 그게 뭐 중요할까. 성문밖학교 학생 중 한 명이 작성한 '염소에 대하여' 자료를 보면, 염소의 뿔은 절대로 만지지 않아야 한다. 너무 습한 환경이 아닌지 주의하고, 먹이는 건조한 것을 주는 게 좋다. ‘별이’와 ‘달이’는 성문밖학교에 온 지 곧 1년이 된다. 염소는 종종 강아지, 닭, 당나귀들과 싸운다. 싸운다기보단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 같다. 염소의 눈은 사시처럼 양쪽을 향하고 있다. 싸움을 피하는 방법일 수 있겠다 싶다. 

    #5. 성문밖학교가 공식적으로 키우는 동물은 아니지만 고양이가 여러 마리 살고 있다. 창문 밖으로 살금살금 고양이들이 지나가다가 학생들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다. 수업을 하다보면, 교실 밑에서 고양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귀여운 고양이들은 소리와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다. 점심때만 되면, 국어 선생님이 고양이들을 살뜰히 챙긴다. 먹이와 물을 주시는데, 학생들도 동참한다. 먹을 것을 주는 게 아마도 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따뜻한 방법이 아닐까. 

    #6. 성문밖학교에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이번 겨울, 돼지 두 마리를 데려왔는데 울타리 쳐진 막사를 부수고 달아난 것이다. 덩치가 꽤 있던 녀석들인데, 아직 살아 있을까 걱정이다. 마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처럼 돼지가 탈출했다. 검복리 마을 주위를 수소문 하고 찾아다녔지만 결국 돼지는 미스터리처럼 사라졌다. 동물을 키우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는 사건이었다. 

    #7. 아침도 아닌데 닭이 울고 있다. 아, 닭은 아침에만 우는 게 아니었다.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운다. 자신의 새끼가 위협을 받을 때도 울고, 닭들끼리 싸울 때도 울고, 배고플 때도 울고, 목마를 때도 운다. 닭의 운명은 우는 데 있는 것 같다. 

    고양이와 들개가 닭의 새끼를 죽인 적이 있다. 냉혹한 생태계의 피라미드를 학생들은 생생히 목격했다. 동물들은 서로 물고 뜯고 죽인다. 어떤 과학자는 자연의 섭리는 적자생존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다른 생각을 한다.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서로 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위하는 측면도 분명 있다. 닭의 새끼를 보호하는 듯 보였던 염소의 행동이나, 토끼의 새끼와 한 울타리에서 오순도순 잘 지내는 강아지, 염소와 교감하듯 나란히 길을 걷는 당나귀 등. 자연의 세계는 적자생존보단 공생이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자연에서 동물들을 만나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성문밖학교 학생들은 등굣길부터 여러 동물들과 인사하고 서로 챙겨준다. 학생들이 동물들을 챙기는 것뿐만 아니라 동물들 역시 학생들을 보듬어준다. 동물들은 커가고 학생들도 성장한다. 그 과정 속에서 탄생과 죽음, 이별과 사랑, 다툼과 화해, 독존과 공생, 상처와 치유 등 인생의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교과서에선 볼 수 없는 개념학습이고 연습문제이며, 대단원 종합평가이다. 

    간디는 한 나라의 품격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동물을 학대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치를 떤다. 아마도 그들은 동물한테 받은 사랑이 부족했지 않았을까. 그저 하나의 작은 평범한 개인으로 성장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깨닫는다. 

    필자가 좋아하는 <날아라 병아리>(넥스트 2집)라는 노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내가 아주 작을 때 / 나보다 더 작던 내 친구 / 내 두 손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 / 작은 방을 가득 채웠지 / 품에 안으면 따뜻한 그 느낌 /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느껴졌었어.” 

    동물들의 심장 소리를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 고마운 일이고, 가장 행복한 일이다. 어린 시절 각인된 감성은 오래 간다. 잊을 수 없는 동물들의 사랑이야말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광주시민저널> 제52호(2018.7.10-7.25) 교육칼럼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5. 30. 15:49 카테고리 없음

    * <광주시민저널> 제51호 교육수기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각 대안학교들마다 미디어에 대한 고민이 많다. 한마디로 과한 스마트폰 사용 때문이다.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요즘 학생들, 더 나아가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 푹 빠져 있다. 실제로 최근 통계에 따르면, 조만간 인류의 50억 명이 스마트한 모바일 폰을 휴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인구는 약 75억 명이다. 3000억 회 이상의 애플리케이션(앱) 다운로드가 이뤄졌고, 수십만 개의 앱퍼블리셔(앱을 만들어 배포하는 회사)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사이버 물리 시스템’의 3C가 핵심이다. 물리적 자연 세계와 인터넷으로 통용되는 사이버 세계가 서로 소통하며 정보를 주고받는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3C는 계산(Computation),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컨트롤(Control)이다. 가까운 미래 및 현실의 세계를 계산하고, 나의 의지와 소통하며, 기계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세상이다. 스마트폰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준다.


    세상은 급변, 다변화 하고 있다. 미디어는 진화하고 있으며 콘텐츠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싫증이 나면 금방 앱을 꺼버리고 게임을 지우면 된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뇌구조 역시 설정(Set)과 재설정(Reset)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인간의 관계 역시 금방 새롭게 관계를 형성하였다가 필요가 다 하면 지워지고 만다. 그렇다면 과연 학생들은 어떠한 미디어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대안교육은 미디어에 대한 어떤 교육을 해야 혹은 하지 말아야 할까? 언제나 고민이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다. 미디어는 결국 소통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미디어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노트북, 태블릿PC, TV, 종이와 연필 등 다양하다. 소통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미디어(media)는 미디움(medium)의 복수 어이다. 미디움은 원래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뜻을 지녔다.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바로 미디어인 것이다.


    미디어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미디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며, 미디어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직업을 얻는 가능성이 열린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대안교육에서 미디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질적인 차원이 조금은 달라진다. 학생들의 개성과 성장을 고려하면 미디어를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 미디어는 일상에서 늘 접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기체와 같이 사용된다.


    수학을 생각해보면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문제를 풀거나 그래프를 미디어로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를 이해하는 건 결국 우리의 머리다. 수학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설계(아키텍처)하는 인재가 필요하다. 앞으론 누구나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지만, 아무나 그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미디어의 활용은 중요하지만, 미디어를 만들고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미디어의 속성을 이해하고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가 제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나간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건 너무나 재미있다. 이제 자연과학과 산업기술, 인문학과 사회과학, 경영학과 예술은 미디어 없이 발전할 수 없다. 그런데 누구나 활용 가능하다면, 즉 누구나 제 손에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쥘 수 있다면 어떤가? 적어도 파워유저(자유자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필요시 자신에게 적합한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사용자) 이상이 되어야 한다. 프로그램을 직접 코딩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변용하고 연결하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말로 우선 머리로 논리를 이해하고, 수학의 깊이를 맨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더불어, 대안교육에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디지털 격차이다. 다함께 같은 출발선에 서야 한다는 점(과정)은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은 디지털 격차의 속성이다. 앞으론 분명 디지털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잘 활용하느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니다. 코딩을 하고, 내 맘대로 변동해서 활용할 수 있느냐, 업데이트 혹은 업그레이드를 신속히 하여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디지털 격차가 발생할 것이다. 누구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활용할 수 있지만 맞춤형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인재가 되려면 수학의 진수를 느껴야 한다. 수학을 잘 하려면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며 다양한 사고가 가능해야 한다.


    성문밖학교에선 수업 시간에 노트북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인 적 있다. 결론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분명한 건 디지털 격차를 막을 순 없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다. 학업 격차는 고스란히 미디어를 잘 다루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확장될 것이다. 물론 일부는 학업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미디어를 찾아 갈 것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면 말이다. 미디어 도입과 활용에 대해 시기상조란 말로 혹은 형평성이라는 개념으로 아니면 감성과 손의 감각에서 나오는 학업이라는 차원에서도 미디어를 규정할 순 없다.


    성문밖학교에서 미디어는 이미 학생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주어져 있다. 교육용으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인터넷을 활용하거나 수업 시간에 연필과 노트를 쓰는 것 자체가 미디어를 쓰는 일이다. 동아리 시간에 노트북을 쓰고, 방과 후 일부는 선생님의 동의를 얻어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 미디어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 혹은 교육 일반에서 중요한 건 미디어의 전적인 활용여부라기 보다는 자율과 약속 그리고 계획과 자제(중용)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성장을 논할 수 있다.


    『콘텐츠의 미래』(리더스북, 2017. 11)의 저자 하버드 경영대학원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확장되는 콘텐츠의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네트워크는 더욱 유기적으로 진화할 것이고, 각자 가지고 있는 노하우는 공개되고 공유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열렸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이 성공했으며, ‘디지털 대화재’라고 일컬은 현재이자 미래의 세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그런데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단순히 콘텐츠를 네트워크화 하고 공개하는 게 전략은 아니라고 밝혔다. 철저한 계획과 정교한 가이드와 함께 공개와 공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미디어를 어떻게든 도입하고 활용해야 하는 대안교육이라면 역시 교육의 차원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자율과 약속, 계획과 자제가 없는 미디어 남용이라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미디어를 활용하되 건강하게, 미디어를 도입하되 계획적으로 접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디어가 메시지라면, 그 메시지가 과연 무엇이며 어떤 맥락을 지녔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던져지는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폭력이다. 미디어는 폭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미디어는 정말 중요하다. 미디어를 잘 다루는 건 더욱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건강한 미디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건강한 미디어 교육은 때론 미디어보다 앞서서 이뤄져야 할 수도 혹은 미디어 없이 먼저 숙고해야 할 필요도 있다. 미디어를 다루는 건 결국 사람(학생)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5. 1. 16:04 카테고리 없음

    대안교육과 글쓰기, 학생들이 이미 좋은 글이다

    지난 4월 둘째 주 성문밖학교 학생들은 강화도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강화도의 석모도 자연휴양림을 숙소로 삼고, 전등사와 연미정에 오르고 석모대교를 건넜으며 고려산 진달래꽃들을 둘러봤다. 또한 고인돌유적지와 평화 전망대에서 사진작가인 이시우 선생님을 통해 나를 낮추고 상대방 아래에(under) 서서(stand) 서로를 이해(under+stand)하는 지혜를 배웠다. 특히 수려한 봄 날씨는 그야 말로 선물이었다.

    성문밖학교는 강화도 여행을 기행문으로 작성하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성문밖 여행 공모전’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글을 잘 쓴(?) 학생들을 격려했다. 모든 학생들이 기행문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고 각 교사들이 공정한 심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 가운데 과연 글을 잘 쓴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단순히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차원을 넘어 ‘글쓰기’는 대안학교에서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글쓰기는 줄타기와 같다. 긴장감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글에는 본인의 품성이 고스란히 베어난다. 이성 혹은 감성이 풍부한지, 주변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고민은 어느 정도 해보았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희망적인지 혹은 비관적인지, 퇴고는 여러 번 했는지 등. 글쓰기는 아마도 삶을 관통하는 의지이자 자신의 내공을 드러내는 집적체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너무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서도, 힘을 주어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연’이라는 말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처럼 글 역시 내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글쓰기 관련 두 영화가 있다. 하나는 <더 챔프(Resurrecting the Champ)>(2007)이다.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주인공은 글쓰기를 링 위에 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건 언제나 두렵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인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고 자신의 모든 게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시선들을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한다. 심지어 주인공은 잘못된 정보로 기사를 쓴 후 온갖 지탄과 두려움에 직면한다. 주인공은 링 위에 홀로 선 권투 선수와 같았고, 큰 펀치를 맞은 셈이다.

    다른 영화는 <파인딩 포레스터>(2000)다. 이 영화는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J.D. 샐린저의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 통에 형제를 잃은 주인공은 홀로 은둔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한 빈민가의 흑인 소년을 만나면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흑인 소년은 가정의 상처를 글쓰기로 승화 하며 남다른 솜씨를 갈고 닦아 왔다. 작가는 작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주인공은 흑인 소년에게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글을 쓸 때 생각부터 하려고 하지 마라. 생각은 나중에 떠오른다. 우선 가슴으로 써라. 그 다음에는 머리로 고쳐서 써라. 글을 쓰는 첫 번째 열쇠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우선 가장 중요한 건 글에 다양한 색깔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모든 글을 잘 쓸 수 없다. 악기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많은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에는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글, 감상적이고 사색적인 글, 공상적이고 역사적인 글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다. 어떤 글은 보고서가 되고, 어떤 글은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글이 된다. 어떤 글은 채택이 되고, 또 어떤 글은 채택이 되지 않기도 한다. 기행문이 있고, 일기가 있으며, 독후감이 있다. 글은 다양하다.

    다양한 색깔은 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학생들 역시 매우 다양하고 다르다. 최근 읽은 <지식인 복잡한 세상을 만나다>(완웨이강, 애플북스, 2018.03)은 현대교육의 컨베이어 벨트식 시스템을 비판한다. 학생들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유전자가 전부 다르다. 특히 생년월일부터가 다 다르다. 태어난 날이 다르기 때문에 학업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저자인 완웨이강은 “발육 정도가 모두 다른 학생을 한자리에 놓고 훈련시킨다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상적인 교육모델은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라 수업이 진행되는 1대 1 학습법, 이른바 눈높이 교육”이라고 적었다.

    완웨이강은 현대의 교육체계가 소득 수준과 가족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점을 드러냈다. 소득이 많고 대화가 많은 교양 있는 가정에선 주인 의식이 고취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는 지시를 잘 따라서 그대로 만들어지는 기성품이나 세공 솜씨와 소재로 소장의 가치가 생기는 공예품 만드는 교육을 넘어서자고 주문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웨이강은 “통치계급을 위한 교육은 표현력, 예술적 감각, PPT 수준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작문 수업에서는 창의력, 감정 표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와 논리를 강조한다”고 밝혔다.

    대안교육에서 학부모들이 바라는 지향점은 글쓰기 능력일 것이다. 필자는 수학 역시 글쓰기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의사소통하고 논리를 더욱 다듬어 가는 것이 수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국가적인 논술 시험을 위해 수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입증한다. 수학을 못 하면 글을 못 쓴다. 분명, 글쓰기는 글쓰기 교육만으로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여행과 사색이 함께 흘러가고, 무료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자기 부정과 극복이 반복되어야만 좋은 글이 탄생할 수 있다.

    만약 입신양명을 위해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최고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순간 본인의 글에는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글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가꾸는 거름과 같다. 마음의 씨앗을 어떻게 뿌리느냐에 따라 좋은 열매가 맺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마음의 텃밭에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물줄기를 지속적으로 보태줘야 한다. 스스로든 아니면 주위에서든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글도 다양하고, 학생들도 다양하다면 글쓰기 교육 역시 다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한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은 필수다. 지하철에서 읽은 한 편의 시는 글쓰기 교육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게 한다. 고춘식 작가의 ‘봄, 교실에서’이란 시는 “얘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마냥 봄인데 보일 리가 있나요.”라고 노래한다. 학생들이 이미 봄이자, 한 편의 좋은 글이고 좋은 글의 가능성이다.

    * <광주시민저널> 제50호 교육칼럼입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4. 17. 05:45 카테고리 없음

    * <광주시민저널> 제49호에 실린 교육칼럼입니다.

    최근에 한 학생과 우연히 상담을 진행했다. 현재 나이는 20살인데, 고등학교 3학년으로 성문밖학교에 다니고 있다. 고민이 많았고 방황을 좀 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청소년 시기에 1∼2년은 매우 예민한 시기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늦은 게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강조해도 어떻게 이해하랴. 그래도 상담을 해주는 교사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해 얘기를 나눴다.

    그 학생은 수학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놀란 사실이 있다. 예제 문제를 답을 보며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수학 공부를 답을 보며 공부하다니. 다행히 확인 문제나 연습 문제는 직접 도전해보고 있었다. 절대 수학 문제를 답보면서 공부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여러 번 고민을 해본 후에, 정말 마지막에야 모르는 문제에 대해 답을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수능 시험을 목표로 공부 중인 그 학생은 마음이 급했다. 퇴계 이황 선생님은 공부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제1순위는 바로 ‘조바심(조급함)’이라고 했다.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바심을 물리치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상담을 마치면서 일주일 정도라도 좀 쉬라고 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인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보자고 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를 해보자고. 며칠이 지나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행복한 수학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긴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공부하는 게 즐거워야 하는데, 억지이자 고통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배우는 것인데, 공부가 학생을 우울하게 하다니. 그런데 행복한 수학을 발견했던 적이 있다.

    이번 겨울에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라는 어른들의 수학 공부 모임에선 일본인 수학자 모리타 마사오 씨를 데려와 3회 수학콘서트를 연 바 있다. 모리타 마사오 씨의 책은 『수학하는 신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을 읽다가 직접 저자를 데려와 수학콘서트를 개최한 것이다. 국내엔 거의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3박 4일간 모리타 마사오 씨는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개최했다. 수학교육의 혁신적인 모습을 보인 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모리타 마사오 씨와 함께 한 수학콘서트는 대한민국에서 수학교육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그동안 수학교육은 획일화의 공교육과 지나친 사교육이 이끌어왔다. 그런데 겨울에 열린 수학콘서트는 다른 수학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의미가 상당하다. 다른 수학이란 계산 문제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깊이에 맞닿아 보는 것이다.

    모리타 마사오 씨가 주목한 전 세계적인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수학 시간에 그림을 계속 보도록 했다. 수학 문제를 풀거나 정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매시간 그림만 하염없이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있으면, 수학적 사고에서도 사고를 확장하고 깊은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계산만 하다보면 사람은 이기적일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하고 깊은 사고가 가능하다면 공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후부터는 시간만 있으면 학습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조는 경전을 인용해 매사에 정성을 다하라고 신하들에게 당부했다. 마음가짐이야말로 공부의 출발이다.

    수학콘서트는 수학교사들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행복하게 수학콘서트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구체화 한 것이 바로 수학콘서트였다. 스토리펀딩으로 3백여 만 원을 모으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하고 도움을 주면서 응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수학콘서트였다. 특히 『수학하는 신체』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 씨와 역자 박동섭 박사가 함께 해서 더욱 즐거웠다. 필자는 마치 일본의 만담(漫才)을 보는 듯한 유쾌함을 느꼈다. 모리타 마사오 씨는 학생들과 함께 수학을 활용해 상상하고 정서를 쌓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계산보다 정서가 훨씬 더 가능성 있는 교육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 모임에선 올해 국내 수학자 혹은 수학교사와 함께 수학콘서트를 개최해보려고 한다. 모임의 수학교사들과 활동가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펼쳐볼 수 있도록,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대안 모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준비해볼 예정이다. 물론 사전에 더욱 많은 논의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수학, 행복한 수학을 찾아서 다시 여정을 떠날 것이다.

    상담을 했던 학생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동서양의 철학자인 공자와 칸트는 비슷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칸트는 지성이 배제된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배제된 지식은 공허하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갈수록 이 말들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친 듯이 공부만 해서도,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고 생각만 많이 해서도 안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답을 보면서 문제를 풀고 싶은 마음, 늦었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신속히 따라잡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물어보고 싶은 건 정말 그렇게 하는 게 행복하냐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노력하며 고민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공부라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복한 수학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어른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환경 탓만 하기엔 학생들의 마음이 너무 소중하고 안쓰럽다.

    수학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빅데이터와 SW는 모두 수학에 기반하고 있다. 내가 왜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내게 행복한 수학은 무엇일지, 행복한 공부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다함께 더 고민해보길 부탁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세상은 의미를 상실할 수 있고 중심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찾아야 한다. 행복한 수학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고 행복을 위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4. 7. 11:08 카테고리 없음

    안녕하세요. 다음주 성문밖학교_2018년 봄 트래킹 관련 참고자료(이선희 글쓰기 선생님)를 아래 및 첨부와 같이 올리오니 숙지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7월 8일 갑신일(甲申日) 맑음
    정사와 가마를 함께 타고 삼류하를 건넜다. 냉정에서 아침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를 접어들었을 때였다. 태복이가 갑자기 몸을 조아리며 말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아뢴다.
    “백탑이 현신함을 아뢰옵니다.”
    태복은 정진사의 마두다.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모롱이를 막 벗어나자 눈앞이 어른어른하면서 갑자기 한 무더기의 검은 공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정진사가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의 툭 트인 경계를 보고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지, 그렇구 말구! 아니지, 아니고 말고. 천고의 영웅은 울기를 잘했고, 천하의 미인은 눈물이 많았다네. 하지만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옷깃에 떨굴 정도였기에, 그들의 울음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다 보니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짝지은 것일 뿐이야. 이 때문에 상을 당했을 때 처음엔 억지로 ‘아이고’ 따위의 소리를 울부짖지. 그러면서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소리는 억눌러 버리니 그것이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꽉 뭉쳐 있게 되는 것일세. 일찍이 가생은 울 곳을 얻지 못하고, 결국 참다 못해 별안간 선실을 향하여 한마디 길게 울부짖었다네. 그러니 이를 듣는 사람들이 어찌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정진사가 다시 물었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기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펼쳐진 끝없는 땅, 요동벌판의 풍경과 마주한 박지원은 그곳을 “훌륭한 울음터”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좁은 뱃속에서 지내다가 넓은 세상으로 나와 크게 울 듯이, 새로운 풍경 앞에서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느낀 것 아닐까요? 이 글의 키워드는 ‘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스히폴 공항에 내려 터미널 안으로 불과 몇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나는 천장에 걸린 안내판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그것은 입국자 대합실, 출구, 환승 수속 창구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다. 밝은 노란색 바탕에, 높이는 2미터, 가로는 2미터 크기다. 디자인은 단순하다. 불을 밝힌 알루미늄 상자 안에 든 플라스틱 간판일 뿐이다. 이 상자는 전선과 공기 순환용 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천장의 강철 버팀대에 매달려 있다.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세속성에도 불구하고, 이 간판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이국적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릴 것 같은 즐거움이다. 이국적 정서는 특정한 곳에서 나온다. Aankomst(도착)에서 a를 두 개 쓰는 것에, Uitgang(출구)에서 u와 I가 잇달아 나오는 것에, 외국어 밑에 영어가 쓰여 있는 것에, ‘접수대’라는 말을 쓸 곳에 balies라고 쓰는 것에, 프루티거체나 유니버스체 같은 실용적이면서도 모더니즘 냄새가 나는 글자체를 사용한 것에.

    그 안내판이 나에게 진정한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첫 번째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영국의 안내판은 절대 그런 식이 아니다. 영국에서라면 노란색이 좀 옅을 것이고, 활자체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부드러운 쪽이었을 것이고, 외국 사람들이야 혼란을 느끼건 말건 외국어 표기는 하지 않을 것이고, 글자에 a가 이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이 a의 반복에서 나는 다른 역사, 다른 사고방식의 존재를 느끼며 혼란을 경험한다.
    플러그 소켓, 욕실을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항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사실 스히폴 공항의 안내판을 만든 나라는 영국과는 아주 다른 나라인 것 같다. 민족의 특성을 연구하는 대담한 고고학자라면 이런 글자체의 연원을 20세기 초의 드 스틸 운동(de sitijl 운동. 영어로는 the Style. 1917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잡지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몬드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추상 회화 운동)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눈에 띄는 영어 병기의 연원은 네덜란드인의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1602년 동인도회사의 건립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 안내판의 전체적인 단순성의 연원은 16세기 동맹제주(1579년 위트레히트 동맹으로 연합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네덜란드 북부의 7개주)와 스페인 사이의 전쟁 동안 네덜란드의 민족성의 일부를 이루게 된 캘빈주의적 미학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장소에서 안내판이 이렇게 다르게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유쾌한 생각을 입증해준다. 나라는 다양하고, 국경을 넘어가면 관행은 변한다는 것. 그러나 차이만으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적어도 오랜 시간의 기쁨은, 그 차이가 영국에서 가능한 것보다 더 나아 보여야 한다. 내가 스히폴 공항의 안내판이 이국적이라고 느낀 것은 이 안내판으로부터 그것을 만든 나라, 공항의 아위트강 너머에 있는 나라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영국보다 내 기질과 관심에 더 맞을 것이라는 암시, 모호하지만 강렬한 암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에서

    →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공항의 안내판을 보고 알랭 드 보통은 그것이 “내가 다른 곳에 도착했다는 첫 번째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합니다. 사소한 사물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차이를 발견해내는 것!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겠지요? 이 글의 키워드는 ‘안내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음악에 맞춰 한 걸음 내딛자 소녀는 몸을 움찔거렸다. 소녀는 나보다 먼저 다음 동작을 치고 나갔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섬의 전통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전통음악이라니 살짝 실망했지만 춤은 밀도 있게 이어졌다. 춤이라고 보기엔 민망한 율동에 가까웠다.
    소녀와 나는 말이 안 통했다. “우리 이렇게 돌래요?”라고 전달하려면 10초 동안 웃으면서 “응응?” 하고 동작을 보여 주고 상대가 “씨(si, 네)” 하고 수줍게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쉬운 세 가지 동작을 선택해 계속 반복했다. 서로 마주한 채 가슴을 맞대고 180도 돌기, 함께 팔짱 끼고 360도 돌기,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상대의 정수리에 오른손 올리고 상대만 세 바퀴 돌리기.
    섬의 할아버지들로 구성된 악단이 가끔 듣기 좋은 소음을 내면서 연주를 했다. 어떤 악기들이었는지 어둠 속에 있어서 잘 못 봤지만 타악기, 관악기, 현악기가 고루 조화된 것처럼 들렸다. 퐈앙퐈앙, 삐삐삐, 칙칙, 소녀는 악기 소리에 맞춰 오래 춤을 췄던 것처럼 나를 리드했다. 춤은 반드시 남자가 리드해야 한다고 스페인어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했던 게 생각났지만 소녀가 더 잘할 수 있다는데 내가 굳이 나서는 건 남자의 자존심 운운하는 마초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소녀에게 몸을 맡겼다.
    소녀는 내가 동작을 틀릴 때마다 수줍게 웃었다. 평소 나였다면 부끄러워 바로 자신감이 떨어지고, 비례해서 동작의 크기도 작아지고, 그래서 또 실수를 연발하는 악순환에 풍덩 빠졌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춤의 모든 걸 책임진 소녀가 나와 춤을 계속 추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추기 싫었다면 내 실수에 차가운 무표정이나 미간의 주름 한 번쯤 날려 주었을 거다. 나는 동작이 틀릴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어 그녀의 호의에 답했다.
    소녀는 꽃이 화려하게 수놓인 상의를 입고, 꽃송이처럼 생긴 털방울 모자를 쓰고, 머리를 곱게 넘긴 채 하이라이트로 개나리색 치마를 휘날렸다. 서울에선 촌스러운 패션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섬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쁜 전통의상이었다. 소녀는 그 작은 섬에서 가장 어렸고, 미혼인 여자들만 가장 화려하고 매혹적인 색의 치마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여성들은 붉고 칙칙한 단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홀로 개나리색 치마를 나풀나풀 날리고 있었다.

    문제는 내 신발에서 터졌다. 꿍짝꿍짝 발이 잘 맞아 가던 찰나 내 오른쪽 신발의 끈이 확 풀려 버린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탐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신고 온 육중한 등산화였다. 춤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끈을 묶지 않기로 했다. 괜히 끈을 묶다가 좋은 흐름을 놓쳐 버리면 궤도를 잃은 지구와 달처럼 허망한 신세가 될지 몰랐다. 예민하게 발가락 끝에 힘을 줬다. 지구와 달은 충돌하지 않았고 우리의 춤은 계속되었다.
    - 로드스꼴라, <로드스꼴라,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 중에서   

    → 이 글은 여행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에 다니는 학생이 쓴 것입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일 것 같습니다. 실수를 해도, 신발끈이 풀어져도 소녀와의 춤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 글은 키워드는 ‘춤’이겠지요?


    말하자면 내 얼굴은 1시 50분이다. 시계 바늘이 둘 다 위로 뻗친 모습이랄까?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 때문에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화난 얼굴 같아 보인다. 나이가 들어 눈매가 처지는 것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종종 인상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내가 잘 웃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못되게 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 그런가, 나는 좀 착하게 보이고 싶은 콤플렉스가 있다. 성형할 용기는 없고(실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착해 보이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웃는 것이다.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고, 적당히 반응하고, 적당히 웃으면 사람들은 곧잘 인상 좋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심한 경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웃느라 아픈 턱을 쉬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한다. 그럴 때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은 그렇게 못돼 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착하게 보이기 위해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배꼽 있는 데까지 푹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웃는 인상이 참 좋다’라는 칭찬은 내게 달디 단 독약과 같았다. 한번 좋은 인상을 심으면 늘 좋은 인상이고 싶고, 어쩌다 얼굴 찡그린 일이 있으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웃는 얼굴이 늘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진짜 즐거워 웃을 때도 있지만, 즐겁지 않을 때도 이왕이면 웃고 싶었다는 것이다. 필리핀 공정여행을 떠나면서 35리터 배낭을 준비했다. 이것이 필요하면 저것도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면 이것도 필요한 멍청한 짐 꾸리기 덕분에 배낭은 터질 듯 무거웠다. 배낭 외에 준비한 것은 하나 더. 낯선 사람,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 앞에서 빠질 수 없는 웃는 얼굴. 이 얼굴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꺼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웃는 얼굴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첫 아침. 나는 홀로 길을 나섰다. 필리핀 국립대학 안에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사람이 사는 동네가 나온다(신기하게도 대학 안에 마을이 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도 골목도 개도 집도 모두 내가 아는 단어지만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기만 하다.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은 게으를 것이다’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꼬마들, 할머니들,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 웃통을 벗은 중년 남자, 소년들, 청년들 할 것 없이-심지어는 닭도, 개도 모두 길에 나와 서 있었다-길은 밖이 아니라 곧 집인 것 같았다. 모두가 함께 사는 집.
    나는 마치 남의 집에 방문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주뼛거리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채 걷고 있었다. 25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하신, 10년 전부터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낡은 수동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감히 셔터를 누르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Good morning!” 당황한 나는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 했다. 그런데 뒤이어 누군가 또 인사를 건넨다. “Good morning!” 그렇게 그날 아침의 인사 행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누군가는 담에 기댄 채로, 누군가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그들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미소로만 답하던 나도 조금씩 입을 달싹거려 보았다. “Good morning!”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Good morning!” 그러면 그들은 여지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인사에 답을 해주었다.
    그들의 미소에 이유가 있었을까? 낯선 이방인에게 잘 보일 필요 따위 없는 그들의 미소는 ‘그냥’ 미소였을 것이다.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이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가벼운 염원 같은 인사. 그러니까 말하자면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는 ‘백화점 미소’가 아니고 ‘골목길 미소’라고나 할까. 백화점 판매원들은 항상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하지만 그 너머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골목길에 나와 선 사람들이 나에게 건넨 인사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필리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매끈한 백화점 바닥보다 우둘투둘한 골목길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토박이이고, 그들이 이방인인 한국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곁을 지나는 동남아시아 사람에게 미소로 인사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사에 인색하고 미소에 야박한 한국인인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길을 잃었다. 큰 길은 작은 길로 갈라지고 작은 길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그 끝에서 농구를 하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필리핀 사람들은 농구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터를 내어 만든 작은 농구 코드에서 1인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 역시 내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마주 인사한 뒤 그를 지나쳐 가려다 용기 내어 길을 물어보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더니 남자는 내 손에 든 카메라를 보고는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한다. 슛하는 동작을 취하는 그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필리핀에서의 첫 날, 내게 인사를 건네던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무리 웃어도 결코 턱이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웃음은 억지웃음이 아니니까. 내 웃는 얼굴 때문에 나를 꺼려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행 중반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내 억지웃음, 아니 억지라는 표현은 너무 가혹하니까 ‘애써’ 웃음이라고 하자. 내 애써 웃음을 처음부터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부류였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그들 역시 나에 대한 편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과 사람과 나 자신에 대한 편견마저 뛰어 넘고 싶었던 필리핀 공정여행. 이제 하루가 지났다.
    - 이선희, 희망제작소 연재 ‘편견을 넘어’ 중에서
    (원문보기: http://www.makehope.org/?p=2688)

    → 이 글은 제가 쓴 것입니다^^ 필리핀으로 공정여행을 갔던 첫 날의 인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여행자에게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필리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이 글의 키워드는 ‘미소’입니다.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3. 28. 11:26 카테고리 없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교육은 진정한 서비스가 아니다

     

    남한산성 성문밖학교에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봄을 맞이하는 신입생들이 활기를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올 겨울을 겪은 성문밖학교는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교육과 문화 차원에서 다름의 가능성을 꿈꾸는 학생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새 학기에 만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대안학교를 선택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첫째, 질적으로 다른 영어 학습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각 대안학교마다 특성이 있겠지만 성문밖학교는 원어민들이 가치와 문화 및 역사, 생활로서 영어를 주고받는다. 제주 강정 문제에 대한 노래를 하고, 한국의 정치문화 변동에 대해 스스럼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우리나라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고찰하고, 미국에서 왜 총기 사건이 학교에서 발생했는지 알아본다. 대안학교에 대한 기대 중 한 축을 자리하는 건 외국어에 대한 높은 열망이다. 이 열망은 좀 복잡하다. 영어를 잘 해서 성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할 수도 있겠으나, 새로운 생각과 다름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고자 하는 바람이 함께 섞여 있다. 성문밖학교는 후자를 지향한다.


    둘째, 일반 학교에 대한 부적응 때문이다. ‘일반’이라는 말은 굉장히 획일적이다. 그래서 다름이 필요하다. 일반 학교에선 숨이 막힐 정도로 선행 학습과 경쟁이 일상화 해 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미친 듯이 쳇바퀴를 돌린다. 대치동 사교육의 불야성은 꺼질 줄 모른다. 극단의 사교육 경쟁은 공허를 낳는다. 학생들은 공허에 숨이 막힌다. 한편, 부적응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생활면에서 부족하진 않지만 친구를 사귀거나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있다. 친구들이 공부만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도 대안학교에 문을 두드린다.


    셋째, 학교 자체를 거부해 스스로 눈과 귀를 닫아버린 학생들도 있다. 보고 듣는 게 없으니 할 말이 없다. 가장 심각한 건 이 학생들이다. 헤어날 줄 모르는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침잠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학생들이다. 사실 학교에 대한 불만이라기 보단 가정 내에서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 무엇을 해도 불만이 많아서 학교라는 틀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궁여지책으로 이들 역시 대안학교를 찾는다.

      

    우리나라, 특히 우리나라 교육은 정말 큰일이다. ‘왝 더 도그(Wag the dog)’라는 표현처럼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꼬리는 규제이고 몸통은 교육의 본질이다. 규제는 각종 행정과 규약, 규정, 제도, 정책, 획일화 한 방향성 등으로 포장되어 교육을 흔들고 있다. 교육의 본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바로 성장이다. 성장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제될 수 없다.


    최근 한 국립도서관을 방문해서 예약한 장소를 이용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날 예약한 분은 부친상으로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서관 직원은 예약자가 방문해야만 장소를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속으로 참 씁쓸해 했다. 이전에 공동 사용자들이 참석을 하면 이용 가능하다고 안내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예약자와 함께 공동 사용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하지만 도서관 직원은 예약 장소를 이용하려면 나중에라도 예약자가 온다는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공동 사용자가 참석하면 예약 장소를 사용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도서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대리자로 서명을 하고 가까스로 예약 장소를 사용했다.


    도서관 해프닝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교육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된다. 정작 중요한 건 예약 장소의 사용임에도 불구하고 규제가 사람보다 앞서 버린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 시스템은 네거티브 전략을 쓴다. 문제를 삼고 지적을 하며 패널티를 준다. 선진 문화 시스템을 2년 정도 체험해본 필자는 포지티브한 그들의 전략에 감동을 받았다. 규정은 규정대로 있되, 각각의 예외와 맥락을 고려한다. 그래서 선진 문화 시스템은 규정만 해도 수백페이지에 달한다. 달랑 한 두 장짜리 규정을 갖고 된다, 안 된다 따지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학교가 변하고 있다. 수업마다 벽을 허물고, 학교 간 소통을 활성화 한다. 성문밖학교에서 교류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학교는 인문학버스, 과학버스 등을 통해 현장에서 프로젝트 중심으로 교육을 펼친다고 한다. 인종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 정말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언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다. 온라인으로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비영리 온라인 교육 ‘칸아카데미’부터 교육의 혁신을 보여주는 ‘TED ed’ 등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교육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공교육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필자가 국내의 수학버스가 있다고 해서 알아보니 돈부터 얘기했다.


    요새 매우 흥미롭게 본 책 중에 『서비스 그레잇』(장정빈, 영인미디어, 2018.02)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고객이 기대하지 않았던 플러스원을 제공하는 엑스트라 마일이 중요하다. ▶ 놓치기 쉬운 마이크로 밸류를 채워 줌으로써 고객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이 기업에 몇 백 배의 효과로 되돌아오게 만든다. 신뢰에는 쌍방이 존재한다. 서비스는 결정적 순간의 총합이다. 규정이라는 한계를 넘어 홈런을 치는 순간 고객은 황홀경에 빠진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기업은 불만이나 클레임 처리 과정에서 고객의 기대를 뛰어 넘는 감동을 선물한다.


    교육은 분명히 서비스이다. 서비스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서비스가 아니라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하려는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런 식의 서비스는 절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헌장을 외우고, 애국가를 합창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다. 수능 시험으로 줄 세우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게 성장이다. 그럴 때 비로소 창의성이 함양된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상이다.


    『서비스 그레잇』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학자 시어도어 레빗은 “드릴을 사가는 소비자는 드릴을 산 것이 아니라 그 드릴로 뚫을 구멍을 사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고객이 원하는 것은 제품 자체가 아니라 그 제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서비스, 즉 솔루션이라는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학생을 학교에 보내는 건 학교 자체가 필요해서는 아니다. 학생에게 필요한 솔루션을 찾기 위해서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은 원활한 교류의 솔루션이 필요하다. 혹은 편식하듯 편협한 사고를 가진 학생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상의 솔루션이 요구된다. 내 자녀에게 필요한 걸 학교가 서비스로 제공해야만 진정한 교육이다. 학교라는 틀에서 솔루션이 그저 생길 리가 없다. 대안교육은 각 학생별로 필요한 솔루션이 집중할 수 있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다.


    교육은 언제나 위기다. 공교육은 언제나 더욱 위기다. 우리나라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많은 현장에서 교육의 붕괴를 탄식하고 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우리 교육에서 창의적 융합 인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젠 대안교육이라는 몸통이 더욱 나설 차례다. 

    * <광주시민저널> 제48호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3. 22. 16:07 카테고리 없음

    요즘 아파트 상가를 지나다보면 심심찮게 ‘코딩학원’을 보게 된다. 뭐 원래 있었던 컴퓨터 학원들이 코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나 싶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발단이 되었다. 왜냐하면 SW교육을 본격 도입했기 때문이다. 2018학년부터 SW교육은 초1-4학년, 중1학년, 고1학년에 적용된다.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적용하니 이제 모든 학생이 SW교육을 받는다. SW교육의 의무화이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은 '창의적 융합인재' 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이과 구분을 없애고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의 창조력이 결합된 통섭형 인재를 길어내겠다는 의지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현장에서부터 노력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창의'와 '융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SW란 과연 무엇일까?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건 개념에 대한 테두리를 설정하는 것이고, 테두리 밖을 배제한다는 역효과를 불러온다. 창의와 융합과 SW는 정의하기가 정말 어렵다.

     

    SW야말로 창의와 융합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SW에는 기획, 설계, 실행, 논리, 디자인, 검증, 마케팅, 보수 등 사실 우리가 아는 모든 게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W란 말은 1953년에 수학과 통계학 전공 교수인 존 터키 박사가 데이터 분석과 계산의 측면에서 고안해낸 말이다. 그는 비트(bit)라는 말도 만들었다. 이즈음에 인공지능이란 말도 생겨났으니 인간의 능력이 점점 고도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SW는 만질 수 없는 일련의 지시·명령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엔 디지털 콘텐츠의 의미까지 합해져 광의의 의미로 SW가 사용되고 있다.

     

    SW의 중요성이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우리 실생활은 웹(PC)에서 앱(모바일)로 넘어가고 있다. 아마도 언젠가 모든 플랫폼이 웹에서 앱으로 완전히 전환될 것이다. 인터넷은 유선에서 무선으로 그 외연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제 스마트폰으로 못 하는 일은 없다. 쇼핑, TV시청, 영화감상, 노래듣기, 게임, 학습, 메일, 결제, 노트, 디자인, 소통 등 모든 것이 내 손안에서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SW를 모르면 디지털 문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SW교육을 시키고 싶다면 오히려 자유로움을 주는 게 훨씬 낫다. 자유로움이란 사물에 대한 애정으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다빈치는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보려는 사람, 보여주면 보는 사람, 보여줘도 안 보는 사람. 보려는 태도가 창의성을 꽃피운다. SW교육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초 소양', '저작권', '정보 윤리', '놀이 중심 알고리즘 체험' 등이 눈에 띈다. 공교육의 차원에서 SW가 지향하는 바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SW는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될 수 없는 자유로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우리가 대부분 사용하는 컴퓨터OS는 윈도우 체제이지만, 그 반대에 놓여 있는 건 리눅스이다. 리눅스는 PC의 공개운영체제로 핀란드 헬싱키대학에 재학 중이던 리누스 토르발스(Linus Torvalds)가 만들었다. 그는 무료로 리눅스를 배포했다. 소스코드는 공개되어 수백만의 개발자들이 보완하고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독점적으로 운영되는 체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향상되는 시스템. 과연 둘 중에 어떤 시스템이 더 나아질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혁신이라는 측면에선 후자가 더 바람직하다. SW의 본질은 바로 자유로움에 기반 한 혁신에 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SW교육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디지털 격차를 없앤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나 SW를 통해 정말로 창의적이고 융합 마인드를 가진 학생을 길러내고자 한다면 다음을 유념해야 한다. SW교육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사가 설명한 바대로 그대로 잘 수행하는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될까? 그런 학생은 모방을 잘 할지언정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 창조에는 이르지 못한다. 또한 누가 SW교육을 담당할 것인가? 현재 교사들의 역량은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SW의 세계를 따라잡기엔 관료적 SW교육은 소프트하지 못하고 하드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수시로 SW의 세계를 접하도록 하라고 답하고 싶다. 이런 저런 SW가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 알아서 관심을 갖게 되고 배울 의지를 갖출 수 있다. 프랑스의 ‘에콜42’이라는 IT 창업 전문교육 기관은 교재도 교사도 없다. 팀워크를 통해 동료들에게서 배운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교사 중심이 아니라 학생 중심의 학습이 이뤄지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뛰어넘는 연습이야말로 현장에서 원하는 인재상이다.

     

    학생들을 위한 여러 SW교육 사이트들이 있다. <소프트웨어야 놀자>, <엔트리>, <주니어 소프트웨어(koreasw.org)> 등 다양하다. 이와 더불어 더욱 추천하고 싶은 사이트는 SW교육의 대표 격인 <Code.org>와 <오픈튜토리얼스(생활코딩)>이다. 각 사이트별로 프로젝트를 열고 진행 상황도 점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내 아이가 왜 SW를 배워야 하는지부터 고민이 필요하다. 개발자로 성장할 게 아니라면 전문적인 코딩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저 좋은 툴을 잘 활용하는 법만 배우면 된다. 영어전공자로서 수많은 영문학 작품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생활영어만 잘 하면 되듯이 말이다. 더욱이 SW교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IT기기를 잘 다루고 관심이 있다고 해서 좋은 곳에 취업해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SW개발자들은 월화수목금금금은 물론이고, 임금을 떼이거나, 몸이 망가지는 게 다반수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즐기면 될 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창의와 융합, SW는 정의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함 자체가 정의일지 모르겠다. 학생이 정말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의 창조력을 함양하여, SW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좋은 SW를 계속 접하고 호기심을 갖는 방법밖에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이다. 즉, 교육의 본질에 닿는다는 뜻이다.

     

    SW를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한 재난관리 오픈소스 플랫폼 ‘우샤히디(스와힐리어로 증언, 목격 등을 뜻함)’을 주목해보자. 지진이나 폭력 등 지역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데이터와 위치 기반 정보를 연결해주는 장이 바로 우샤히디다. 비영리 SW교육 강좌 ‘생활코딩’을 알아가 보자. 그 어떤 외부의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그저 좋아서 시작한 SW교육 운동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좋은 SW가 나와서 세상을 바꿀지 모를 일이다. 그건 바로 어떻게 SW를 교육하느냐에 달려 있다.  


    * <광주시민저널> 제47호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3. 22. 16:06 카테고리 없음

    “조용히 해!”, “여기 보자!”, “움직이지 말고, 주목!”, “자세 바로 하렴!”, “누가 떠드나?”, “필기 다 끝냈니?”, “숙제 안 한 학생 앞으로 나와!”, “다음 시간 숙제는 공식 외워오기다!” 등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이다. 수업에서 흔하게 듣는 교사들의 잔소리이다. 교사들은 여러 학생들을 통제하기 어려워 이같이 외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학생들은 침묵 속에서 머리로만 학습을 하게 된다. 한창 활발히 움직이고 떠들면서 소통하고 주위를 둘러볼 시기에 말이다.

    이와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 수학자가 한국에서 수학콘서트를 펼쳤다. 그는 바로 『수학하는 신체』(에듀니티, 2016)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이다. 그는 1월 22일(월)부터 1월 24일(수)까지 한국의 학생, 학부모, 교사들을 만나 수학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들려줬다. 한마디로 수학은 ‘수’에 대한 학문이 아니며 ‘정서’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수학콘서트는 지난해 3월부터 수학교사들과 마을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라는 독서모임에서 출발했다. 이미 지난해 6월에는 모리타 마사오의 책을 갖고 비판적인 공개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그때 『수학하는 신체』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를 직접 불러다 얘기를 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이번 겨울방학에 실제로 이뤄졌다. ‘어깨 빌려주기’란 말은 뉴턴이 기존의 학자들이 정립한 학문의 세계에서 도움을 얻었다는 의미로 사용했었다.

    ‘수학으로 어깨 빌려주기’ 교사들은 스토리펀딩을 통해 수학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었다. 교사들은 입시 교과목만의 수학이 아니라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수학을 깨닫기를 바랐다. 또한 수학은 단지 더하기 빼기만이 아니라 역사성을 띠고 변모해가는 진리의 체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수학은 배워야 할 모든 것이다. 특히 삶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나 미술과 같이 수학이 필요하다.


    신체가 가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수학은 절실하다. 아울러, 수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멀리, 더 멀리 사고가 가능한 것이다. 한편, 모든 시민을 위한 수학이 필요하며, 절대적인 지식이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고 스토리펀딩에서 강조됐다. 요컨대, 수학교육이 바뀌기 위해선 교사와 교육정책가, 학부모들 모두가 바뀔 필요가 있다.

    모리타 마사오는 TED 강연에서 ‘정서’로서의 수학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게 바로 수학이라는 활동이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온전히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수학하는 신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위대한 작곡가들이 있고 그 작품들을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있다. 그런데 위대한 수학적 발견은 수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모리타 마사오는 수학연주회를 열어 좀더 많은 사람이 수학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한다.


    모리타 마사오가 강조한 ‘정서’로서의 수학은 오카 기요시라는 수학자가 강조한 자세다. 수학사에 큰 정점을 찍은 오카 기요시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수학자의 공부』(사람과나무사이, 2018)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책상에 앉아 책만 보고 공부하기보다는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마음으로 수학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진정한 수학이란 칠판에 쓰인 글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군자의 수학'이라 부른다.”


    수학교육의 목적은 계산이 아니라 내면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위의 자연을 애틋한 마음으로 관찰하는 게 필요하다. 몰입하고 사색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몰입은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것이다. 오카 기요시는 수학이란 내면에 이미 갖춰져 있는 정서를 문자판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수학교육은 100분 동안 30문제를 초집중해서 풀어야 한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의 수학문제들은 수학교사들이나 강사들이 풀어내기에도 벅찰 정도로 어렵다. 그런 문제들을 학생들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훈련하며 학습을 한다. 수학적 발견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물론 시험이라는 게 아예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교육이란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의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왜 수학공부를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비단 수학교육뿐만 일까. 우리나라 교육의 전반이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고 학업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는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정책과 학부모들의 욕망이 함께 똬리를 틀고 있다. 학부모들은 제 자식이 좀 더 많은 문제를 풀고 좋은 성적을 거둬 사회에서 성공하길 기대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학생들을 밀어붙이면 밀어붙일수록 저항감이 커지고 학습은 지지부진해진다는 사실이다. 요즘의 학업에서 요구하는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는 절대 문제 풀이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더욱이 정서와 배움에 대한 태도가 없이는 평생 이뤄져야 할 교육이 단기간에 수단으로서만 끝날 가능성이 높다.


    모리타 마사오가 한국에 와서 얘기한 부분들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른 방식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 만약 내가 수포자라면 그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을 못한다고 질책한 교사들과 이미 틀에 가둬놓고 억압하는 교육정책, 그리고 학부모들의 지나친 기대와 욕망이 함께 뒤섞여 있다.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작 중요한 학습이 요원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모리타 마사오의 주장들이 정답은 아니다. 그와 오카 기요시가 말하는 ‘정서’로서의 배움이 과연 무엇인지는 애매모호하다. 내 안에도 여러 정서가 있을 텐데 그 가운데 무엇이 빛이고 어둠인지는 배워가는 입장에서 모를 수 있다. 또한 과연 수학이 수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연을 해석하고 관계에서 소통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학습하는 개별자를 넘어서 교육하는 보편자로서 확장되기 위해선 수와 수학이라는 학문적 체계는 필요한 게 사실이다.


    압축 성장을 위해서 과학기술을 수단으로서만 활용해온 게 우리나라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하나도 타지 못한 건 상 자체의 한계를 넘어 안타까운 게 사실이다. 연구자들이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배움의 정수를 느끼지 못하는 한 노벨상은 먼 나라 얘기다. 그래서 계산보다 ‘정서’로서의 수학을 복원하자는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콘서트는 교육혁신의 작은 발단이 될 수 있다. 수단으로서의 배움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서의 학습을 복원하는 일이 결국 창의성을 배양한다. 지름길만 선호하다 보면 정작 가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저널46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2018. 3. 22. 16:04 카테고리 없음

    학생들에게 퀴즈를 하나 냈다. “올림픽에서 제일 많이 메달을 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러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사람은?” 학생들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이름의 첫 글자만 기억난다는 학생도 있었다. 정답은 바로 마이클 펠프스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이 이름. 그는 미국의 수영 선수다.


    한 때 박태환 선수와 경쟁을 펼치기도 한 마이클 펠프스. 필자는 그에 대해 그냥 몸이 수영에 특화해서 좀 특별하고, 운동을 많이 한 선수로 기억했다. 키도 크고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는구나 정도. 그런데 최근 『골든룰』(밥 보먼·찰스 버틀러, 매일경제신문사) 책을 읽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이클 펠프스는 매일 탁월해지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끊임없이 수영에 매달려왔고, 수영을 정말 사랑하는 선수였다. 특히 마이클 펠프스는 밥 보먼이라는 코치를 만나 수영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책에서 코치 밥 보먼은 마이클 펠프스를 어떻게 훌륭한 선수로 만들었는지 10가지 ‘골든룰’을 소개한다. 마이클 펠프스는 10살 때 밥 보먼을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코치와 선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 더 나아가 배움을 고민하게 되었다. 과연 배움에도 골든룰이라는 게 있을까? 학습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들을 위해서 골든룰을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든룰』이라는 책을 쓴 밥 보먼은 확신한다. 이 규칙들만 따르면 당신이 사업을 하든, 학생을 가르치든, 운동을 하든, 예술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마이클 펠프스는 올림픽 메달을 위해 수영을 한 게 아니었다. 수영을 사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면 좋겠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수십 만 번의 스트로크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어렸을 때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고 있어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수영을 한 이유도 ADHD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덴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주위의 환경, 더 나은 선수의 출현, 뜻밖의 실수 등 다양하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본인의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상수다. 변수는 어쩔 수 없는 돌발 상황으로 다가오지만 상수는 변하지 않게끔 할 수 있다. 골든룰의 핵심은 하루하루 탁월해짐으로써 먼 길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배움도 분명 마찬가지다.

    학생들을 상담하다 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학생들은 배움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지식으로 간주할 때가 많다. 물론 성장하는 단계에서, 잘 모르는 상황에서 주위의 상황을 탓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배움이란 내부에서 일어나는 탈피 과정이다. 기존의 관습과 편견을 버리려는 발버둥이야말로 배움이다.


    특히 배움에 대한 태도야말로 좋은 결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배움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성적은 달라진다. 성공과 메달을 위해 공부한 학생들은 결코 창의적인 솔루션을 발견하지 못한다.


    교사란 코치이고, 인생의 멘토이다. 학생은 선수이고, 삶의 멘티이다. 학생이 교사가 되고, 멘티가 멘토가 된다. 때론 교사가 학생이 되고, 멘토가 멘티가 된다. 문제가 답이 되고, 답이 거꾸로 문제로 변하기도 한다. 배운다는 건 느낀다는 것이고, 그 느낌의 총체를 삶의 태도로 확립한다는 의미다. 내가 학생이자 멘티이고, 교사이자 멘토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필요하다.

    마이클 펠프스는 많은 메달을 따고 자만한 적이 있다. 대마초를 피우고, 음주 운전을 해 법의 심판과 언론의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마이클 펠프스는 수영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훈련을 시작한다. 정상의 수영 선수에서 은퇴했던 그는 다시 밥 보먼을 찾아간다.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탄생한 게 올림픽 신기록들과 앞으로는 없을, 최다 메달과 금메달 기록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인간의 중요한 능력으로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성’ 등이 꼽힌다. 세계경제포럼에서 전 세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갈수록 사회는 복잡성을 넓혀가고, 문제는 일대일에서 다대다 구조로 변모하고 있다. 개념과 문제를 유형화 해 학습 받은 학생들은 절대 복잡한 문제 해결 능력과,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몇 달 전 경기도 교육대토론회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혁신학교라는 타이틀이 이젠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로 불릴 정도로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성토가 이어졌다. 초-중-고-대라는 교육의 선순환이 이뤄지지 못해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학부모가 많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특성화고 학생들이 사고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사회에 발을 내밀기도 전에 구조적 모순에 의해 압사당한 것이다. 그 모순이란 학교와 기업의 성과를 위해 학생이 희생되는 구조다. 일반교육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더 좋은 학교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학생들은 본인이 원하는 교육을 수혜 받지 못하고 있다. 왜 공부를 해야 할까라는 물음조차 없이 교육정책에 의해 방향성을 지시 받는다.

    문제를 푸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골든룰』은 강조한다. 수학 문제 하나를 풀더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훈련했으며, 고민해보았는지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런 개성들이 모이면 거대한 문화가 된다. 특히 창조적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유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책은 말한다. 그때야 비로소 골든룰에 따라, 과정이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배움의 골든룰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사들의 역할은 배움이 즐거울 수 있다는 걸 발견하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데 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배움의 골든룰을 실천하고, 또 누군가는 실천하지 못한다. 그 결과 누군가는 올림픽 최다 (금)메달 리스트가 되고, 또 누군가는 출전조차 못한다.  


    <광주시민저널> 제45호

    posted by 남한산청소년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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